
많은 작품 중에 너무 많이 들었거나 영상을 통해 접했기 때문에 읽은 것처럼 느껴지는 작품 중의 하나가 '프랑켄슈타인'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출간된 지 200년이 넘는 작품이지만 작금의 시대에 오히려 선견지명처럼 그린 내용들이라 섬뜩한 감정마저 들게 하는데 이번에 새로운 테마 시리즈인 호러, 공포를 대표로 하는 작품들 중 하나란 사실만 봐도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느낀다.
영상에서 나오는 기괴한 모습의 로봇 같기도 하고 머리에 이상한 장치를 단 괴물의 형상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본래 책 속에서 나오는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사실과 이 작품에서 드리워진 진행들은 오늘날 여러 패턴으로 생각해 보면서 생각할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지금이야 페미니즘이란 용어로 익숙한 여성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당시 이 작품을 쓴 메리 셸리의 삶은 그녀가 19세에 썼다는, 당시의 시대에서 여성의 지위가 차지하고 있는 환경이나 그녀가 택했던 사랑의 도피, 결혼생활을 통해 함께 이 책을 들여다본다면 훨씬 작품의 이해를 하기가 쉽다는 생각이 든다.
액자 형식으로 그려진 내용의 구성도 획기적이었지만 괴물이 탄생하기까지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프랑켄슈타인이란 인물이 겪은 과학의 진보와 그 탄생의 결과물로 인한 파탄에 이르는 고통들이 괴물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극강 몰입을 선사한다.

새로운 미지의 장소 개척을 하기 위해 북극 탐험을 나선 월튼이 누님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자신이 들은 프랑켄슈타인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들어있는 형식을 취하는 내용은 자신이 이미 겪었던 열정의 위험성을 월튼에게 경고하기 위해 들려주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자연철학을 공부했던 프랑켄슈타인이 각고의 노력 끝에 동물의 사체와 동물을 이어 붙인 창조물을 탄생시키지만 정작 그 자신도 끔찍한 모습을 보고 도망치는 시초의 불안을 자아낸다.
영화로 비춘다면 아마도 사이보그처럼 형성된 캐릭터로 보일 것 같은데 실제 이러한 상상의 날개를 덧붙여 그려나간 저자의 글은 읽는 동안 내내 물음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점과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실은 동일 인물처럼 다가온 점은 그들 사이에 깃든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정황들이 공감을 산다.
이는 자신이 만든 괴물의 소행으로 이어진 동생의 죽음과 이후 그와 괴물이 만나면서 괴물의 부탁인 자신과 똑같은 여자를 만들어 달라고 청을 하게 되고 만드는 과정에서 이를 거부하게 되자 복수심에 불탄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죽이게 되는 흐름이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온다.

읽는 동안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감각이 뒤떨어지지 않는 이야기 구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원치 않았지만 탄생하게 된 괴물의 존재, 그 괴물이 어떻게 기적적으로 인간의 세계에 발을 내밀고 함께 하고자 한 열정과 노력에 반해 인간들은 그의 끔찍한 형상 때문에 모두들 거부를 한다.
이 모든 것이 그만의 잘못인가? 에 대한 물음은 과학의 발전과 창조적인 탄생의 여파가 인간들 세계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이용해야만 하는지, 이름조차 없어서 자신을 만든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으로 불린 괴물의 삶을 통해 연민의 정을 함께 느끼게 한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의 삶을 함께 생각해서 읽는다면 그녀가 처했던 당시의 모습들을 투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진보적인 부모 밑에서 자신의 재능을 남성들보다 펼칠 기회가 없었던 한계, 괴물을 통해 자신이 처한 사회의 이중적인 잣대에 대한 비판, 과학이 주는 이기의 편리함을 남용함으로써 벌어진 인간의 오만과 그릇된 욕망, 허세에 대한 경종을 울린 작품이 아닌가 싶다.
끝까지 쫓고 쫓기는 삶의 연속, 괴물의 청을 들어주었더라면 둘의 삶을 행복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는 그 이후의 상상력들, 이 책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나와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편협한 시선과 판단들이 얼마나 극단적인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작품이란 것과 그녀가 쓴 프랑켄슈타인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했다는 점은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 출판사 협찬으로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