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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토님의 서재
  •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전하영 외
  • 12,600원 (10%700)
  • 2021-04-07
  • : 16,615

모든 작품이 리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이번 작품 집에서 리뷰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이유로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의 리뷰를 짧게 작성했다. 나도 우리의 소원 하나를 말하자면 더이상 이런 식으로 문학을 모독하는 일들이 벌어지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예술을 이념을 위한 도구로 쓴다면 그것이 예술인지 선전도구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예컨대 기독교 전도영화를 보자. 누군가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장면을 보며 기독교 신자들은 애절하게 울겠지만 그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관객은 오롯하게 객관적인 예술성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이념을 설파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면 어떤 극적인 재미가 있다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오로지 여성과 성소수자뿐일까? 그게 아니라면 여성과 성소수자는 약자 중에서도 더 약자, 그러니까 가야트리 스피박이 이야기한 하위주체에게 목소리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역사와 소설을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일까? 만일 스피박이 이 작품을 읽었다면 경멸 이상의 혐오감을 표현 했으리라 믿는다. 정말 하위주체, 서발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을 읽고 싶다면 아룬다티 로이를 읽어보자.

 

고증부터 이야기 해보자. 제중원은 1884년 갑오개혁 행정 개혁 때 내무아문으로 폐합 되었고 세브란스병원이 생긴 것은 1904년이므로 안나 서가 활동하던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제중원 간호원복장이 등장할 여지는 없다. 더구나 당시의 명칭은 간호원이 아니라 간호부였다는 것은 아래 여러 고증오류를 볼 때 고려의 대상조차 못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작가는 그저 과거를 활용해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권리를 주장 중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정치 논리 앞에서 역사적 사실 따위 사소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역사소설이 아니니까.

 

작가의 역사 무시는 이런 사소한 기관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안나의 아버지 서윤식은 돌연 안나를 지참금을 받고 시집을 보낸다. 작가는 팔아버렸다는 표현을 쓰고 싶었던 것같다. 서윤식은 한남, 아니 조선남이니까. 그 이유는 더욱 황당한 것이 당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용주와 홍옥임의 자살사건을 떠올리고 혹시라도 안나가 그런 소동을 벌인다면 자기 이름이 더렵혀질 것이 두려워서란다.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신분도 없던 천기의 딸을 수양딸로 들여서 이화학당까지 보내고 “제중원”의 간호원까지 시켰을까? 이 사실은 역사의 무시는 아니라 개연성 멸시 정도 되겠지만 그 다음 단락에서 심각한 역사적 무지가 나타난다.

 

김용주 홍옥임의 정사(情死)는 1931년 4월 8일이다. 그리고 이 소식에 놀란 서윤식이 안나를 팔아버렸고 남편의 새디즘과 학대에 지쳐 이혼하고 돌아온 것은 빨라도 1932년 정도라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그런데 느닷없이 “3·1운동이 한창이던 그 때” 라고 했는데 그때는 1930년 평양고무공장 여성 노동자가 근무환경개선을 외치고 시위가 벌어지던 때라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임신한 채 돌아온 윤경준을 만난다. 그런데 일본군이 위안부를 끌고 간 것은 1939년 2차대전 발발 후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3·1 운동은 1919년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이쯤 되면 작가가 쓰고 있는 역사는 몇 번째 지구에서 벌어진 사건인지 의아하다. 작가의 정치적 의도를 위해서라면 역사를 마음대로 고치는 것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걸까? 한 공동체가 겪은 역사적 현실을 오로지 작가의 이념을 위해 편집해서 갖다 붙여도 되는 것일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공동체의 역사적 시공간을 빌려 쓰며 최소한의 조사조차 하지 않는 불성실함은 어떻게 봐야 하나?

 

여기까지 오면 개연성을 묻는 것은 이미 사치에 불과하다. 그래도 독자를 우롱할 의도가 아니라면 몇 가지 서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윤경준을 처음 만난 날 안나는 윤경준을 아가씨라고 불렀고 한눈에 남장을 한 여자라고 간파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경찰은 윤경아가 남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거, 사내 끼리는 믿고 처분합니다. 요즘 저런 변태성욕자들 때문에 미치겠어요.”라고 말하고 여장 남자 수성을 풀어준다(일제강점기에는 경찰이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았고 순사라고 불렀지만 이 역시 다른 고증 오류에 비하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경찰 역시 한남, 아니 조선남이니 아둔해서 그렇다고 하자. 그래서 남장 여자를 못 알아보는 아둔함도 말이 된다고 넘어가자. 그럼 여장남자는 귀신같이 잡아내는 영민함은 어찌 되는 건가? 독자는 이런 설정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윤선영은 또 어떤가? 동성애자임이 분명한 그녀는 왜 존과 결혼한 것일까? 존이 메리를 돌볼 보모를 구한 것이라서? 그런데 존은 그녀가 과분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사랑한 것이다. 그런 존의 사랑은 철저하게 무시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평론가 이소는 이 소설이 철저하게 “윤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윤리의 시대는 이념의 불필요함과 혁명의 불필요함을 모두가 받아들인 이후에 시작 되었다” 는 옹골찬 말로 이 소설의 가치를 피력한다. 이 말의 함의를 해독하자면 이념도 혁명도 인간을 도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이므로 윤리에 배치된다는 칸트의 윤리관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 작가는 페미니즘 혹은 성소수자의 숨겨진 역사를 밝힌다는 이념을 설파하기 위하여 윤선영의 남편 존을 도구로 활용하는 것 정도는 안중에도 없는데. 미국 남자의 인권은 이미 인권이 아니라서 윤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렇게 문학을 희화하는 것이 용인되어야 하나?

 

낙관하자고 반복되어서 쓰이는 대사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8-90년대 운동권들이 외치던 구호 중 흔히 쓰이던 것 중 하나가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자” 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대사 하나까지 이토록 시대착오적일까?

 

참고 문헌을 보면 <조선의 퀴어>라는 논픽션이 있다. 이 소설은이 책에 나오는 선정적인 에피소드를 당시의 시대정신으로 해석하고 싶은 작가가 얼기설기 짜 맞춘 이야기다. 이념과 정치성 없이 객관적으로 이 소설을 평가했다면 불성실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상후보조차 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래서 정치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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