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미국을 담은 빛 바랜 풍경사진
벌랜드 부부 곁을 스쳐 가는 군상과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뉴욕의 중산층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경들. 제임스 설터는 부분 부분이 빛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벌랜드 부부의 삶의 모습, 분위기, 정취를 그대로 전달한다. 화려하고 지적이고 가끔은 눈부시지만 결국은 허무한 당시의 느낌을 그 때 그 순간을 함께 살았던 느낌을 준다.
리처드 포드는 서문에서 제임스 설터가 이들, 평범한 부부- 고립되고 마멸되어가는 미국문화의 고립된 향유자들을-너그럽지 않은 눈으로 다룬다고 이야기 한다. 비리 벌랜드는 좋은 아빠지만 무능한 남자고, 이들 중 누구도 닮고 싶지 않은 “전형”이며 이들은 삶을 원하면 마치 한번 더 살 수 있다는 듯 가볍게 여기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명 좋은 사람들이지만 말하자면 “깊이”가 없다는 말이다.
글쎄, 소설은 독자의 것이니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제임스 설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리처드 포드가 언급한 부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멸되어가는 미국 중산층 문화의 고립된 향유자로 이들을 그리고자 한 것도 아니고 삶의 진정 중요한 문제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이들을 비판 하려 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심지어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고 마지막 까지도 서로를 존중하므로 우리-이 책을 읽는 미국독자들-누구도 이들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함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설터가 말하고자 한 것은 60년대에서 70년대 후반까지 뉴욕 중산층 지식인을 휘감았던 열기, 시대정신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한 부부의 구체적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래서 네드라의 모델이 되었던 여자는 자신의 묘비명에 소설의 한 구절을 새기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를 비난하고 비판한 글로 읽지 않았기에.
비리 벌랜드는 건축가지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명성도, 혹은 네드라 벌랜드가 원하는 만큼의 금전적 성공도 얻지 못한다. 물론 풍요로왔고 뭐든지 넘치게 많았던 시대, "좋았던 시절"의 중산층이니 충분히 많은 돈을 벌었건만 비리는 스스로리를 좋은 아빠지만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네드라는 비리가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비리는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네드라는 비리에게 가혹하다. 리처드 포드는 비리의 문제점 중 하나가 훌륭한 건축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명성을 얻기 바라는 것이라 말한다. 부당한 것을 원한 것처럼. 포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거다. 명성보다는 실력과 창의력을 가지기를 원하고 명성은 뒤따라 오는 것인데 비리는 반대로 생각했다고. 그 사실을 비리가 몰랐을까?
한명의 프로페셔널한 지업인로서 자신의 직업군에서 명성을 얻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비리는 가우디를꿈꾸는 사람인데 그만한 재능이 없음에 절망한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책을 만들고 인형극를 하며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창의력을, 지성을, 음악적 교양을 드러낸다. 심지어 말년에는 깨닫는다. 자신이 재능과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상주의와 의리, 인간답기 위한 가치들을 들고 헤매던 일들, 바로 그 기억 때문에 그는 유지되고 깨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문제는 그가 그런 자신을 똑똑히 보지 못했고 그게 문제라는 것도(p. 389).
비리는 능력있는 건축가이자 교양있는 중산층이고 분명 평균 이상의 지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 시대 모든 사람들처럼 무엇이 옳은지, 어떤 삶이 바른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드라라는 불꽃처럼 자유로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평생 곁에 둘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소설의 그 누구도 네드라를 영원히 곁에 두지 못한다. 비리는 평범하고 다른 모든 남자들도 평범한 사람인데 네드라는 평범하지 않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네드라.
이 소설은 네드라를 축으로 해서 모든 캐릭터-비리 벌랜드를 포함해서, 아니 특히 비리야말로-가 주변을 공전한다. 네드라는 아름답고 신비롭다. 사치스러우면서 지적이고 영원한 자유를 원한다. 네드라와 비리의 처음 장면은 아름답다. 조랑말을 찾으며 강가의 저택에서 묘사되기 시작한 생활은 눈부셨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만, 캐서린은 말한다. 네드라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여자라고
사실 네드라는 너무나 이기적이라 스스로의 자유를 단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좋은 사람과는 사랑을 해야하고 비리가 지겨울 때는 지겹다고 말해야 한다. 변덕스러운 자신의 감정에 마지막까지 충실하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바로 70년대의 미국이다.
어떤 미국이냐고? 이런 거다. 대마초를 피우고, 가끔은 더한 마약을 하면서 비틀즈와 클래식을 동시에 들으면서 발래와 연극과 영화를 즐기고 안톤 체홉을 읽다가도 인도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읽는다. 어느날은 연극과 비의를 섞은 조오지 구르지예프(혹은 게오르규 구르지예프)스타일의 공연예술을 보고 그 연글의 배우들은 당연히 바가바드기타를 읽는다. 물질적 풍요속에서 허무를 느끼고 정신적 자유를 찾기 위해 마약과 동양의 해탈을 꿈꾸던 시대. 네드라가 바로 그 시대다.
첫 장에서 캐서린은 네드라가 이기적이라 하며 남편 피터가 네드라같은 여자와 결혼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터는 화를 낸다. 하지만 4장에서 캐서린은 말한다. 네드라는 정말 불쌍한 여자라고. 불행하다고. 가정을 떠났으니까. 피터는 아니라면서, 그녀는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심지어 입센의 노라와 같은, 자유롭고 참다운 여자의 삶을 산다고 말한다. 이들이 대화가 네드라의 삶과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인의 시선을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대화에서도 피터는 화를 낸다.
축제가 끝나고 모든 것이 사라질 때 네드라는 죽고 사람들은 남는다. 네드라는 가을에 죽지만 비리는 봄이 되어서야 이탈리아에서 돌아왔다. 처음 그들이 정착했던 집터 강변에서 서서 그들이 함께했던 “영원할 것 같던 오후”를 회상한다. 눈부셨던 오후를 어둠이 가득한 강변에서 바라본다. 이 소설은 눈부신 오후에서 어두운 밤으로 내려 앉는다. 친구들은-특히 네드라는-떠났고 우리는 강변에 서 있다. 피안으로 떠난 네드라를 이쪽 강변에서 바라보듯.
나는 준비됐고,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었어. 마침내 준비가 되었다고.
자유롭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시대는 사라지고 파편들만 남았다.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든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 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제임스 설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미국을 떠돌던 공기, 부유하고 있는 자유의 파편들, 그리고 이미 사라져 버린 정신의 그림자가 떠돌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사랑도 스러졌다는 것을 묘사한다. 가족관계가 스러진 것이 아니라 한 시대와 함께 그들의 모든 것도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의 잔여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시대가 사라지고 있기에 그들은
거짓의 증거들 속에서 거짓을 살았다.
이 장면에서 비리는 딱 한번 네드라에게 화를 낸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우유부단하다. 그가 가진 결점은 그것이다. 우유부단하기에 그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강변에 서서 생각하게 된다. 이제야 준비가 되었다고. 너무나 늦게.
정취와 분위기, 그리고 빛과 풍광의 묘사가 서사를 에워싸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전달한다는 걸 배운 소설이다. 하지만 생소한 표현, 예컨대 "강은 영국인처럼, 은처럼 찼다"고 말할 때 제임스 설터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
번역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유려하고 멋진 번역있지만 중간중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있었는데 원어가 궁금하기도 했다. 이 책은 박상미님이 번역했는데 <올댓이즈>는 김영준님에게 맡겼다. 두 책의 번역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공부가 될 거 같다.
박상미님의 말처럼 이 책 제목의 원어 느낌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Light years라고하면 광년이라는 거리 개념과 가벼운 연대라는 특이한 조어, 두 의미가 된다. 소설 분위기를 보면 빛 속에 떠도는 자유의 정취와 파편, 빛 살속에 먼지처럼 부유하는 가볍고 찰나 같은 우리의 삶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가벼운 나날들이라고 번역하면 그 모든 분위기가 다 증발하고 땅에 떨어진 먼지 조각 같은 이미지만 남는다. 번역의 한계라고 밖에.
읽고 나서 오랜 여운이 남는다. 넘치는 에너지는 아니지만 묵직한 여운이 가슴에 오래 괸다. 가벼운 나날의 여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든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P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