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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zmic님의 서재
  • 영화광
  • 워커 퍼시
  • 13,500원 (10%750)
  • 2021-12-10
  • : 469
1 들어가며
우리는 현재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현 시대의 흐름의 중심에 있는 사조는 포스트모더니즘일 것이다. 문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에서 현대성으로의 이행, 모더니즘식 글쓰기의 탈피, 맥시멀리즘(정보 과잉)을 활용한 형식 실험, 산업화, 정보화로 인해 황폐해져가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블랙 유머가 특징이다. 하지만 1961년 소설이 출간될 당시와 작가 워커 퍼시(Walker Percy)가 살았던 문학적 시대상은 바로 모더니즘의 후반기에 해당한다. 모더니즘 문학에서 흔히 언급되는 작가들로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등이 있다. 이들은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기법을 활용하고 발전시켰으며 내적 독백, 형식 파괴, 비선형적 플롯 구조의 사용으로 인해 일반 독자들에게 ‘난해’하다고 알려져있다. 조이스와 되블린(Alfred Döblin)은 특정 도시(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개성있는 인물(레오폴드 블룸, 프란츠 비버코프)을 등장시킨다. 여기서 작가는 공간을 인식하는 시점을 뒤틀어 버린다. 조이스는 블룸에게 신화적 서사시를 투영하고 장마다 새로운 형식을 도입해서 이야기를 창조한다. 되블린은 도시를 콜라주 기법을 통해 사실적인 절망의 장소로 만들어 인물을 처참하게 붕괴시킨다. 반면 프루스트와 울프는 인간 내면을 독백을 통해 깊게 파헤치고 재구성하며 배경과 동일시되는 감정과 사유를 묘사한다. 이 글에서는 워커 퍼시와 같은 미국 남부 작가인 포크너를 비교 대상으로 삼으며 <영화광>에서 나타나는 특징들과 가치들을 살펴보겠다.

2 <영화광 The Moviegoer> 속 현대성에 관하여
작품의 주인공, 빙크스 볼링은 30대에 진입한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틀어서 살펴보더라도 평범함은 다수를 차지하지만 선호되는 취향은 아니다. 문학 작품에서도 평범함과 전형성, 무개성의 주인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영화광 속 빙크스 볼링은 이 일반적 특징, 전형성 속 비전형성을 통해 하나의 특별한 인물로서 등장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 중 완벽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볼링도 마찬가지로 결점이 많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인간이다. 볼링의 과거를 살펴보자면 그는 참전 용사로 전쟁에 어두운 추억을 갖고 있고 현재에도 여전히 그 영향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다. 어릴 때 형과 부모님을 잃은 점은 작가 워커 퍼시의 개인적 서사가 들어간, 자신의 얼터 에고로 작용하는것 처럼 보인다. 볼링은 일에 있어서나 다른 취미에 있어서나 평범한 현대인일 뿐이다. 가끔 본인이 ‘탐색’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오는 것 말고는, 그의 일상 생활은 무미건조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것 이다. 그의 취미는 일주일에 며칠씩 영화를 보러가는 것과 비서인 여자들과 걸프 해변으로 드라이브를 나가는 것이다. 한데 이렇게 ‘특성 없는 남자’ 인 볼링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먼저 그의 사유와 고뇌는 가히 비범할 정도로 현대적인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다. 작중 “모두가 죽어 있다는 인상이 짙어진 지 좀 되었다.“(p.130)라는 문장이 나온다. 볼링에게 사람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죽어있는 존재이다. 모두가 허상 뒤에 숨어있고, 만나서 대화를 하더라도 진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위선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사람들이 이루는 사회는 보나마나 썩어있다. 죽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뉴올리언스는 볼링이 보기에 황량하다. 하지만 정작 본인, 볼링 자신도 죽어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다른 문장 ”내가 리버럴인지 보수주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양측이 품는 혐오에서 활기를 얻는다. 사실 내게 이 혐오는 세상에 남은 몇 안되는 삶의 징후라는 인상이 강하다.”(p.131) 특정 사람들은 혐오를 통해 기쁨과 결합한다. 이는 작중 시대보다 오히려 현 시대, 21세기에 가장 크게 작용하는 부분인거 같다. 인터넷의 활성화와 익명성의 가면 속 혐오는 더욱 짙어져있다. 남을 헐뜯을수록 우리는 자신을 잊고 점점 타락해간다. 사실 지금 본다면 혐오로 오는 기쁨보다는 오직 혐오가 혐오를 낳는 역할 밖에 없어진거 같다. 우리 시대에서 혐오는 더 이상 삶의 징후가 아니다. 단지 죽음으로의 과정을 더욱 심화시키고 갈등만을 낳는 불필요한 역할로 변해버렸다. 볼링의 사유와 행동은 현대성은 깊이 엮어져있다. 볼링은 친구, 사람들과 깊은 관계에 빠지지 못한다. 그는 삶에서 소외된 존재이다. 현대인의 고뇌와 개인의 고독, 이 두 관념이 볼링을 성립한다. 읽으면서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에마뉘엘 보브(Emmanuel Bove)의 <나의 친구들 Mes amis>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나의 친구들>의 주인공 바통은 친구를 간절히 원하지만 결국 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특성을 지닌 인물이다. 여기서 볼링과의 차이점은 볼링의 고독은 스스로 자신을 고독 속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볼링은 새 친구를 원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가족들과의 관계만을 유지할 뿐. 예전에 그는 진정한 친구로 여겼던 사람들과 여행에 떠난적이 있다. 하지만 여행이 즐거웠음에도 그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것을 끊고 집으로 돌아온다. 흔히 아웃사이더 문학이라고 불리는 소설들, 예를 들어 <인간실격人間失格>, <금각사金閣寺>, <지하생활자의 수기 Записки изъ подполья> 등등.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작품들은 고독을 일부러 만들어낸, 다소 과장된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볼링, 바통, 그리고 <잠자는 남자 Un homme qui dort> 속 주인공과 같이 의미없는 장소들을 거닐고 혼자만의 고뇌를 하는, 분위기에서 구별되는 인물들이 진정한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선 소외된 자의 고뇌, 볼링은 현상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전형성을 추구한다. 자신만의 기준과 생각이 있지만 이를 굳이 드러내진 않는다.

3 사랑과 일탈
작중 볼링은 자신의 비서, 섀런과 사랑에 빠지고, 후반부에는 사촌 케이트와 일탈을 실행한다. <영화광> 속 남성성, 즉 볼링과 주변 남자들은 상징적으로 남성적 사고를 표출하지 않는, 중성적 자아들로 존재한다. 반먄 여성성, 케이트와 섀런, 고모의 경우는 에고가 강하고 적극적인, 감정의 동요가 심하고 강압적이게 묘사된다. 볼링은 여자를 따라다니고 사랑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어긋나있다. 이 어긋남을 바로 잡는 시도가 케이트와 시카고로의 기차여행이다. 이 일탈은, 일상을 멀쩡히 살아가는 볼링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큰 사건이다. 케이트가 자살 시도를 한 후 그들은 볼링의 출장을 겸해서 뉴올리언스를 탈출해 시카고로 향하는데 이 기차 속 대화와 사람들과의 만남, 다시 일상, 원점으로 복귀하는 장면들은 별거 아닌것처럼 보이지만 삶과 죽음, 인생에서의 목표, 사랑과 실존을 다루는 커다란 힘의 의해 작용한다. 기차에서 볼링은 “아름다움은 매춘부다.”라고 생각하고 “돈은 아름다움보다 나은 신이다.”(p.247)라고 평한다.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볼링은 경험을 통해 돈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그리고 대다수의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는 단지 돈을 목적으로 해서가 아니라 “돈은 아름다움과 균형을 이루는 훌륭한 평형추”이므로 단지 아름다움만을 좇는 것이 아닌, 미의 관점 대신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통해 볼링은 새로운 광경과 케이트와의 사랑을 이루고 한층 더 성장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4 도무지 모르겠다
<영화광>의 마지막 문장이자 독백은 바로 “도무지 모르겠다.”(p.294)이다. 이는 흑인이 왜 재의 수요일 미사를 갔는지 의아해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작품 전체를 꿰뚫는 핵심적인 요소가 내재되어있다. 단지 종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볼링은 그 무엇에 관해서도 ”모른다“. 현 사회에서 개인이 알 수 있는것은 없다. 볼링은 더더욱 사회에서 고립된 자로 그는 여러가지에 대해 탐구하고 생각하지만 정작 알고 있는 것은 없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는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

5 시간성과 성장
보통 성장소설 하면 <데미안 Demian>, <호밀밭의 파수꾼 The Cather in the Rye>,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Die Verwirrungen des Zöglings Törleß>과 같이 청소년기의 주인공이 나타나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30세의 영화광이 등장하는 다소 특이한 성장소설은 우리에게 더욱 성숙한 관념들을 선사한다. 볼링의 단조로운 일주일 간의 생활이 어떻게 우리에게 깊이 다가오는가?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사는게 아니라 살아만 있는 인간상을 우리는 볼링을 통해 관조한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모습과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초월적인 인물로 거듭난다.

6 남부 소설의 문학적 가치
미국 남부 소설하면 보통 윌리엄 포크너,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등등이 떠오른다. 이들의 소설은 대부분 남부의 가치와 정신을 표현하는대 반해 워커 퍼시는 현대인의 일상을 포착한다. 포크너는 남부의 정신적 패배의 대물림, 가문의 몰락, 인종간의 갈등, 숭고한 이념과 거친 폭력성을 고찰하므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남부 시골 마을 위주로 폐쇄성과 고립성이 짙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단편을 통해 드러나는 그로테스크와 남부 고딕 분위기를 띈다. 워커 퍼시는 데뷔작 <영화광>으로 모던한 남부의 모습과 외로운 주인공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그려내면서 이어져왔던 고전적인 남부 스타일의 문학적 전통을 탈피하는데 성공한다. 기존 남부 문학의 내용과는 차별화되는, 한 개인의 일상적 생활은 비남부적이면서도 다른 무엇보다도 남부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7 영화에 관하여
이 소설에서 영화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볼링을 영화광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그럼 왜 제목이 영화광일까? 이 소설은 하나의 영화와도 같다. 장면들의 전환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영화광이라는 개념은 다르게 적용된다. 볼링이 볼 때 낭만주의자 대학생이나 형이상학자 회사원 둘 다 영화광이다. 물론 자신도 영화광으로 생각한다. 영화광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삶이라는 영화”를 보는 개개인 모두한테 해당하는 말이다. 현실과 가상 모두 영화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는 필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장면들의 모습일 뿐. 이 소설도 영화이자 영화광을 만들어내는 기폭장치이다. 소설을 다 본 독자들은 영화를 관람한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 시대 속에서 실존하는 우리는 모두 하나의 영화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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