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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 옹호론자들은 자신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진리는 없다'라든가, '진리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주장 자체가 그 진리를 인정하는 꼴이기에 자기모순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회의주의자들은 종종 웃음거리가 되곤 합니다. 철학자 아낙사르코스(BC 380~320)가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아낙사르코스 자신도 환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의 말은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누군가가 ‘모든 진리 주장은 알고 보면 권력욕의 표출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면, 이 명제 자체도 그 사람의 권력욕의 표출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는 언어와 그 개념의 덫에 걸려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모순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주장조차도 언어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덫에 걸려있는 상황’을 표현하고 싶어도, 우리를 옭아매는 바로 그 개념이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자기 지시’(self-reference)의 모순은 흔한 일입니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이해하는 주체인 ‘나’ 자신을 포함할 때 필연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자기 지시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나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거짓이다’ 혹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머리를 깎지 않는 마을 모든 사람의 머리를 깎아준다’라는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자기 지시의 역설이 존재합니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에서 ‘난 거짓말쟁이야’란 발언을 그대로 믿어준다면,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진짜 거짓말쟁이일까요? 그가 진실을 말한 것인데도요? 하지만 반대로 그가 완전히 정직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순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을 안 하는 정직한 사람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참도, 거짓도 아닙니다. 아무 쓸데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 또한 그렇습니다. 한 이발사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자기 수염을 '스스로 깎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수염을 전부 깎아줄 것이오. 다만 '스스로 깎는' 사람은 깎아주지 않겠소.” 이 때 이발사의 수염은 누가 깎아줘야 할까요? 다른 사람이 이발사의 수염을 깎아주는 경우 이발사는 수염을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에 속하므로, 선언한 바에 따라 자신 수염을 스스로 깎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수염을 깎는다면 이발사는 수염을 '스스로 깎는' 사람에 속하므로, 선언한 바에 따라 자신의 수염을 깎을 수 없습니다. 이발사는 어찌하면 될까요?
















이 같은 문제가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자기 지시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 원인의 일부가 자신이라면 이 원인은 사건과 분리될 수 없어 자신의 피드백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피드백은 원자물리학에서 관찰자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끼치는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관찰자는 관찰되는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 정보를 잃게 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러셀은 이 같은 역설을 풀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절망적으로 보냈으나, 결국 1931년 괴델이 이런 역설을 풀려는 시도는 전혀 가망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괴델의 명제는 학문의 기본적인 확신을 흔들었습니다. 인간 인식에는 언제나 틈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다’는 문장도 불확실한 진술입니다. 괴델의 말처럼 이 문장은 증명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언급한 이유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일이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발사의 역설은 사물을 속성에 따라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줍니다. 이처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섹시투스 엠피리쿠스(2C?~3C?)는 회의주의가 함축하는 이런 자기 지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좀 더 유연한 형태로 변환시켰습니다. 엠피리쿠스는 진정한 회의주의자라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라는 식의 모순된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의주의자는 판단을 유보할 뿐입니다. 회의주의의 목적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독단주의를 치유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입니다. 회의주의 핵심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회의주의란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된 것이나 생각한 것을 대립시키는 능력이다. 이때 서로 대립하는 대상과 생각이 팽팽히 맞서기에, 우리는 판단중지(epoche)에 이르게 되며, 그로써 평온함(ataraxia)에 도달하게 된다.” 회의주의는 일종의 치유책입니다. 독단주의자를 치유하여 독단이 가져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회의주의 목적은 확고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자만과 경솔을 치유하고자 함입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진리는 영원하지 않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글로 썼건 또박또박 명시했건 냉철한 시간에 분별 있는 사람이 뭔가를 얻어냈더라도 이는 얄팍하고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똑같이 건전하고 똑같이 이성적인 다른 사람이 논박하고 나서면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런 것은 실재에 참된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회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역시 우리가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궁극적인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는 무뢰한이거나 바보다. 바보라 함은, 우리 인간이 감각 지각으로만 지식을 얻을 수 있기에 궁극적인 실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를 무뢰한이라 함은, 그러한 한계를 알면서 그릇된 자신 철학을 따르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우리 정신은 정념이 지배하며, 이성은 개인 생존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중에 분석적, 계산적 기능을 수행할 뿐입니다. 도덕률 또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인 묵계일 뿐이며, 객관적인 진리와 무관합니다. 예컨대, 에스키모인은 겨울에 늙은 부모와 함께 이동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죽게 놔둔다고 합니다. 뉴기니아의 도부족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용납합니다. 아프리카의 누엘족은 기형아를 출산하면 하마가 사는 강물에 던지는 풍습이 있습니다. 멜라네시아의 어느 부족은 친절함과 정직함을 악덕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가치가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세상에는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다는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면 도덕 문제에 확신을 가질 수 없기에 어떤 도덕 문제에 도 진지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없다는 우려가 커집니다. 
















흄이 도덕률조차 객관적 진리와 무관하다고 말한 점은 독단을 비판하고, 상식을 맹종하는 일상 태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입니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손가락 생채기보다 전 세계 파멸을 선택하는 것이 이성과 상충되지 않으며, 낯선 사람 편의를 위해 나 자신의 파산을 선택하더라도 이성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이성이 진리를 인식하고, 자유의지가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의 실현을 위해 나중에 이성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합리적인 것이 언제나 올바르다는 낙관론은 오해입니다. 사이코패스의 문제는 이성의 결여가 아니라 감정의 결여에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심은 믿음 ‘뒤에나’ 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의심을 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정적으로 우연을 얼마나 잘 인정하는지, 회의적인 질문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왔으며 그에 따라 얼마나 잘 훈련되어 있는지가 포함됩니다. 의심하는 일은 기술입니다. 의심은 학습되고 연마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믿는 성향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새로운 정보를 대할 때 바로 진실로 받아들이지만 나중에 따로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거짓으로 거부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장자(BC 369?~286?)는 삶의 질곡을 헤쳐 나갈 방안으로 어떤 지식이나 어떤 실천적 강령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세계와 삶에 대해 우리 시선을 단적으로 바꾸기를 제안합니다. 특정한 시선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마음을 해방시켜 세상을 ‘아예 다른 눈으로’, 아예 다른 방식으로 볼 때, 그때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세계와 삶은 전혀 다르게 변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여기지만 자신 행위는 종종 사회적으로 유형화되고 구조화됩니다. 심지어 매우 개인적인 일로 보이는 자살 행위조차도 사회에서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사회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은 우리를 얽매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해방시키는 효과가 분명 있습니다. 자연스럽다거나 필수 불가결하다, 선하다, 진리라는 것이 실상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은 사실상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인 힘, 이데올로기의 산물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당연한 믿음 안에 갇혀서 다른 삶의 방식을 꿈꾸는 상상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우리 생각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상호주관’이라는 아이디어는 우리 삶의 순간적인 맥락을 넘어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자신 행동 원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더욱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폭로와 비판,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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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황소 머리>(1942)



피카소의 작품 <황소 머리>는 1990년대 경매에서 293억 원에 팔렸지만, 왠지 조잡해 보입니다. 이러한 조잡함에도 예술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자전거 손잡이에 안장을 결합시켜 소의 머리 모양을 떠올릴 수 있는 피카소의 상상력 때문입니다. 

상상력은 오랫동안 잉태 기간을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 생깁니다. 절박한 순간에 처했을 때 상상력은 별로 관계없는 요소들을 연관 지으며 그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게 합니다.

상상력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그려 보는 일입니다. 상상력은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접촉하여 이루어지는 신비스러운 능력입니다. 상상력은 필요한 모든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존속 가치가 있는 과거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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