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
수학과 진리
북다이제스터  2023/11/15 16:44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 형태의 법칙이 실제 존재하기에 자연에 객관적인 법칙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입니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치일 뿐입니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 법칙을 얻어냅니다. 그래서 많은 과학 법칙이 수학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연에서 수학적인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 변수에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냅니다. 

















수학조차 진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수학은 정교한 공리체계입니다. 공리란 수학 체계에 바탕을 이루는 기본 가정이고 전제입니다. 기하학에서는 참이라고 가정하는 단 하나의 공리, 곧 ‘점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지만, 위치는 있다’라는 공리에서 출발합니다. 결국 공리란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로써 어떤 학문이나 인식체계의 가장 기초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공리체계는 형식논리입니다. 공리라는 유효한 전제를 이용해 필연적으로 유효한 결론을 도출하여 오류를 줄이려는 시도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 믿음 중 일부를 완전히 확실하다고 간주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기반으로 자신의 나머지 세계관을 세우는 주춧돌로 공리를 이용합니다. 우리는 유효한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다른’ 질문 모두를 묻고 대답하는 데 공리를 이용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학의 공리는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으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죄를 대신해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라는 점이다. 이 공리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은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이나 주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공리를 인정하는 기독교 신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이 이 공리에서 도출되는 정리(定理)이기에 논리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자 아르케실라오스(BC 315?~240?)는 공리로 어떠한 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증명하려면 우리는 진리가 도출되어 나오는 전제를 가정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또 다른 전제에 근거함으로써 그 전제를 증명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결코 정지점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결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근거가 탄탄한 믿음 근저에는 근거가 없는 믿음이 자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근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믿음에 대해 어떤 설득력 있는 근거도 내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학자 쿠르트 괴델(1906~1978)은 수학을 포함한 모든 공리체계가 모순이 있는지 여부는 그 공리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이를 보통 ‘괴델의 정리’ 또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합니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증명되어도, 우주 자체가 증명되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안에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고, 벗어난 다음에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수학자 레오폴트 뢰벤하임(1878~1957)과 토랄프 스콜렘(1887~1963)은 공리체계가 완벽하더라도 의도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예컨대, 한국 사람을 규정하는 속성을 빠짐없이 다 적어놓았다고 하죠. 그런데 적어 놓은 속성 모두를 만족시키지만, 동시에 한국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뜻밖의 동물이 발견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불안전한 공리가 보완되면 진리가 발견될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뢰벤하임-스콜렘 정리는 공리 체계가 완벽하더라도 의도하지 않은 완전히 다른 결과 값을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수학조차 진리인지 알 수 없는 회의주의입니다.
















철학자 에드먼드 게티어(1927~2021) 역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지식인가?‘<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1963)라는 논문에서,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 사이에 회자되어 온 지식에 대한 이론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믿음이 정당화되고 참이 되는 상황이 존재하지만,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게티어 문제’라고 칭합니다.



플라톤 이래로 많은 학자는 지식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뭔가를 알기 위해서는, 첫째로 그것이 참(true)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대한민국 수도가 대전이 라고 믿는다면 진짜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둘째, 당신 믿음(belief)이 참이어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온당한 이유도 없이 ‘우연히’ 서울을 대한민국 수도라고 믿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옳다고 판명되었을지라도 당신이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운 좋게 맞은 추측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 믿음은 당신에게 정당화(justified)되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정당화에 있습니다. 사실을 알고 있다는 주장에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식이란 전방위적으로 믿음을 정당화하는 매우 엄격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부분이 지식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용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