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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vs 자비
북다이제스터  2023/11/08 15:50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이상(理想)을 내세웠습니다. 프랑스가 의도했던 박애는 관용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 후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는 점입니다. 자유가 너무 지나치면 평등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못지않게 중대한 문제는 박애가 평등과 이율배반적인 관계라는 점입니다. 지나친 관용은 평등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미국인들은 50년대 심지어 70년대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해가 갈수록 서로 더욱 불평등해졌습니다. 관용이 고무되면 평등 가치는 더욱 쇠퇴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관용은 개인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관용주의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는 놀랄 만큼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입니다. 관용주의자는 개인 스스로 내린 결정을 존중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싫어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 적어도 겉으로는 – 관용을 보이고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용주의자는 사람마다 가치관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될 도덕적 담론이나 논쟁에는 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떤 것도 주장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토론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 견해를 말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노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괜찮아, 우리는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를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굳이 의견 일치를 볼 필요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논쟁에서 이기거나 상대방이 틀렸다고 스스로 깨닫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그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둡니다.



이처럼 관용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정치 철학입니다. 정부는 각 시민이 지지하는 도덕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발상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기에 정부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 법률로 단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정부는 각 개인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존중하고 각자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관용을 강조하고 개인 권리를 존중하는 사상적 전통, 즉 존 로크와 임마뉴엘 칸트에서부터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에 이르는 사상적 전통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는 토론이나 논쟁 대부분은 이 범위 안에서 이뤄집니다.

















각 개인은 사회의 문화와 밀접하게 얽혀 있는데, 우리는 각자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남을 생각하는데 자신만의 가치관과 목적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칸트는 타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배려하는 ‘양심’에서 찾았습니다. 그럼에도 칸트의 선한 양심은 ‘자유로운 자아’를 전제합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자유를 양심의 원천으로 보는 칸트 견해에 반대했습니다. 칸트가 언급한 온전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항상 나의 자유를 확대하거나 제한합니다. 레비나스가 양심의 원천은 자유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수긍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책임 원천이 타인 상황에 대한 공감과 배려라고 주장합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고 이들 짐을 나누는 일이 책임의 출발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1929~ ) 역시 사회 구성원이 노력하면 사회가 바람직하게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이익을 함께 추구하면, 사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레비나스나 하버마스가 언급한 공감과 배려, 이해 또한 사회와 문화에 지배당하는 나의 감정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관용이나 양심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반면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1892~1971)는 개인 도덕성이 집단에는 투영되지 않는다고 보며, 그 이유로 집단에 만연한 ‘이기성’을 지목했습니다. 여기서 집단은 사회나 국가, 민족, 계층 등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니버는 개인들의 도덕성으로 부도덕한 집단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단언합니다. 따라서 톨스토이 류(類)의 개인 도덕성 함양으로 사회가 개혁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관용 관련해서 우리는 혹시 불교에서 무엇인가 배울점이 있지 않을까요? 불교에서 자비는 관용이나 연민, 동정과는 거리가 멉니다. 관용이나 동정,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즉 제거할 수 없는 지위 차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 또한 그렇습니다. 갈 곳 없는 이주자, 쫒기는 이방인에게 내미는 환대 손길은 그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주인 행세입니다. 예컨대, 부자가 자신을 동정하는 가난한 자의 뜻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화를 내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따라서 동정이나 환대는 평등과는 거리가 멉니다.



달라이 라마는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에서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강조되어 있습니다. 평등한 자비심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 능력이 있다는 ‘평등 인식’에서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관점에서 평등합니다. 부처에게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자비란 모든 중생에 대해서 부처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친하든 낯설든, 멀든 가깝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가 부처라면, 모두를 부처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도와주는 일이 바로 잠재적으로 부처인 내가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자비란 스스로가 부처로서, 자신과 만나는 모든 잠재적 부처들에 대해 갖는 마음이고, 그들에 대해 행하는 바입니다. 다른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일은 나만 그렇게 한다고 사회가 바뀌는 일이 아닐 뿐더러 지위 차이가 없는 ‘평등 인식’은 개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사회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현대 사회는 개인이 문화를 넘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길 요구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은 자신 생각을 바꾸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을 받습니다. 하지만 문화는 집단이나 사회 구조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개인 노력만으로는 문화를 극복하기란 어렵습니다. 4세기 불교학자인 세친에 따르면, 사람이 어떠한 유형의 유아론(有我論)을 믿던지, 즉 무아(無我)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아인 개인은 문화에 영향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은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개인에게 그저 관용으로 문화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으며, 참된 평등에서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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