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중세 후기가 되자 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새로운 계급, 곧 상인 계층이 번성했습니다. 상인은 당시 영주와 성직자, 기사, 농노로 이어지는 봉건제 피라미드에서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상인은 농노를 자유민이라고 이름 붙인 임금노동자로 삼기 위해 영주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인은 또한 자신이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안정되길, 소유권이 보장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돈이 넘쳤는데, 세입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던 국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습니다. 왕은 상인들에게 세금을 늘려 국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상인과 국가가 함께 공생하며 발전하는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신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인 계급은 자신들 위상을 강화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당시 유럽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이슬람 세계가 상인들 소망을 이룰 방안이 되었습니다. 상인들은 십자군 전쟁 원정이나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이슬람교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이베리아 영토를 가톨릭 국가 스페인이 다시 회복한 사건)로 이슬람 세계가 그동안 연구한 그리스-로마 문명을 접하게 되고 기독교 이전 고전 사상에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상은 중세 신학자들이 보잘것없고 덧없는 존재로 여겼던 바로 ‘인간’입니다. 무역이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인에게 인간은 독립적이고 지적이며, 모험심이 강한 능력 있는 존재였습니다.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인간형은 전형적으로 돈을 잘 버는 바로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14~16세기) 상인 계급은 인본주의라는 뿌리를 고대 그리스에서 캐어내 자본주의에 이식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인정하며 상인의 경제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신만의 기준, 즉 인본주의로 세계를 판단하기에, 예컨대 ‘식물과 동물은 인간에게 양분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식의 목적론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고 비판합니다. 철학자 볼테르(1694-1778) 또한 자신의 풍자 소설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1759)에서 목적론적 세계관을 꼬집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이란 가장 좋은 목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코는 안경을 얹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안경을 씁니다. 다리는 양말을 신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양말을 신습니다. 돌은 원래 성을 짓는 석재로 쓰이기 위해 생성되었습니다. 또 돼지는 식용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년 내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모든 목적인(目的因)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목적론 사고 속에서 사물은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본질만 가지며, 그러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未完)의 존재로 간주됩니다. 사물 변화는 오직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설명되며, 이에서 벗어난 것은 비본질적이고 비정상적일 뿐입니다. 이러한 목적론 사고가 갖는 위험성은 ‘차별주의’ 논리로 쉽게 전용됩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차별주의적 목적론식 사고 바탕이 다름 아닌 ‘인본주의’ 사고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인 이상 애초부터 인본주의 사고에서 벗어날 순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스피노자는 우리가 차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그 ‘외부’를 사유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컨대 현재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평등한 이분법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서양 역사에서 최근 들어 보편화된 생각입니다. 고대부터 르네상스시기에 이르기까지 인간 분류 방식은 하위 속물에서 상위 이상형 상태까지 위계적 연속체를 이룬다는 ‘단성 모델’이 선호되었습니다(단성 모델에서 남성은 더 열정적이기에 단일 사다리의 맨 위에 있고, 여성은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기에 단일 사다리 밑에 위치합니다). 물론 그때에도 인간을 크게 여자와 남자 두 무리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적인 형태는 남성 단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부터 계속되어 온 여성 억압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범주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은 외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자연을 차별적으로 이해합니다. 이 점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어떠한 범주가 너무나 명확해서 시간과 문화를 초월해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 인도의 승려로서 대승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용수(龍樹, 150?~250?)는 말[言]이 의미하는 그대로 실재도 그렇다고 오인하는 일을 ‘희론’(戱論: 부질없이 희롱하는 아무 뜻도 이익도 없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것과 저것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구분하여 분류하는 일은 사물 그 자체와 무관하게 ‘말의 차이’ 또는 ‘개념 차이’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말에 따라 보이는 세상도 달라집니다. 우리 현실에서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을 붙인 이후에는 이름 그대로의 확고부동한 차별적 ‘진실’로 탈바꿈되고 맙니다.
장자(BC 369?~286) 역시 사람들이 사물을 분절하고 이름을 붙이고 정돈하는 방식 자체에 회의의 시선을 던졌습니다. 분류의 다양성 같은 분류 문제에 부딪쳤을 때 겪는 어려움이 시사하듯, 장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란 사실 인간이 자신의 그물을 던져 만들어낸 매우 인간 중심적 사고라고 봅니다. 인간은 그렇게 형성된 ‘세계’에서 살아가며, 각 시대와 문화, 입장, 편견 하에서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게다가 이런 주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갖가지 가치를 투영해 사물들을 위계화하고 온갖 형태의 ‘시비를 가리고자’ 합니다. 장자는 기존 인식과 가치 전체에 매우 급진적인 비판을 가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넘고 해방되어 세계를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도그마를 경계하며, 각종 도그마에서 벗어나는 도(道)를 추구해야 한다고 장자는 말합니다.
서양 철학사에서도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사상이 있습니다. 이 사상은 정의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누군가가 그것에 이름을 붙일 때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나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론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습니다.
유명론은 특히 유럽 중세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아벨라르는 개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나 문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서구 사상의 대전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에게 개념은 논리학이나 언어학의 대상이지 존재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개념에 존재론적 함의를 부여할 수는 있습니다. 예컨대 개념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많은 것(예컨대 관계, 집합, 수 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벨라르는 이런 존재에 플라톤이 말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신학자 윌리엄 오컴(1287~1347)은 논리학에서 다루는 개념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다고 더 멀리 밀고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그 개념이 무의미하다거나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명제, 추론 형식, 종과 유 같은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며, 인간 사유의 고유한 성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객관적인 실재가 아닙니다. 객관적 진리와 논리적 타당성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오컴이 이렇게 생각한 데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만일 개념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위해 동원되는 추상물이라면, 인식은 개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입니다. 이론적 존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 존재는 우리가 대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고안물이며, 인식이란 이 고안물을 통해 경험을 구성하는 일입니다. 달리 말해, 인식이란 세계를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가 단순히 하나의 명사라고 해서 그 대상이 하나일거라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예컨대 명사 ‘정신’이 있기에 그 명사가 표현하는 대상이 한 가지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둘 중 한 가지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하나는 정신이 곧 뇌라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뇌는 질량과 부피를 갖는 반면, 생각은 둘 중 어느 쪽도 갖지 않기에 이 발상은 맞지 않습니다. 혹은 정신이 분명히 어떤 비물질적인 실체, 혼이나 유령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일단 정신이 결코 단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만 깨달으면 이런 얼토당토않은 결론을 내리는 상황을 피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원하고 욕망하고 이해하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일을 하기에 인간에게 정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짜 정신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범주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은 언어의 속성과 세계의 속성의 혼동을 막아주는 유용한 안내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