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
진보와 발전
북다이제스터  2023/11/06 17:39

중국 환경부에 따르면 중국 경제 성장 때문에 발생하는 생태계 파괴 비용은 국내 총생산의 10퍼센트 내지 12퍼센트에 해당합니다. 곧 국가 경제 성장률과 똑같은 수준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 성장이 만족스러운 삶을 자동으로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지금쯤 낙원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찔할 정도의 경제 성장은 생태계를 더욱 파괴합니다. 국민 총생산이 마치 ‘국민 삶의 질 총계’나 ‘국민 쾌락의 총계’, ‘국민 행복의 총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국민 총생산=국민 오염 생산의 총계’라는 방정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















예컨대, 기업들은 생수가 깨끗한 물이라고 광고하기에 우리는 생수가 아닌 수돗물을 그냥 마시기 꺼립니다. 그렇다면 과연 생수가 정말로 더 깨끗하고 안전한 물일까요?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현무암의 지반으로 걸러졌다는 둥, 구름까지 뚫고 올라가는 스위스의 명산에서 채취했다는 둥, 숫제 천사의 눈물을 받아왔다는 둥 온갖 이유를 붙인 고급 생수가 고작 세 컵 분량에 5달러가 넘게 팔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수돗물 99퍼센트가 음용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 많은 사람이 생수라고 생각하며 마시는 물은 그냥 수돗물입니다. 병으로 판매되는 물 중 절반 이상이 약간의 처리 과정을 거친 수돗물이며, 양대 생수 브랜드인 펩시의 아쿠아피나와 코카콜라의 다사니는 그저 디트로이트시가 제공하는 물을 한번 걸러서 플라스틱 병에 담아 파는 것에 불과합니다. 병에 들어 있는 물을 생수라고 마실 때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기극에 속는 동시에 거들고 있는 셈입니다. 생수를 구입하면 4.5리터짜리 한 병에 평균적으로 1.5달러를 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같은 양의 수돗물을 사용할 때 내는 돈의 2천배에 육박합니다. 이것은 고스란히 경제 ‘성장’에 반영됩니다.



우리는 사실상 거짓말이나 다를 바 없는 무언가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는데, 그런 소비를 별개로 보더라도 그 막대한 플라스틱 병 사용으로 인한 환경 파괴가 실로 엄청납니다. 생수 한 잔에는 같은 양의 수돗물에 비해 2천 배나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미국만 놓고 보더라도 플라스틱 생수병의 70퍼센트는 곧장 매립되며, 토양을 오염시키고 물길을 막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캘리포니아와 하와이 사이 어딘가에 텍사스 주의 두 배 정도 크기로 넓은 플라스틱 부유물 ‘섬’이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물 같은 식품에 대한 수요는 탄력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음식이 싸더라도 정해진 음식 양 이상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사실이 식품 회사들에 의미하는 바는 식품산업 성장률이 인구 증가율(또는 감소율)과 대략 동일할거란 점입니다. 식품 회사들은 그런 미미한 성장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맥도날드 같은 회사가 인구 증가율보다 더 빠른 발전을 원할 경우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똑같은 양의 음식에 돈을 더 많이 쓰도록 하든지 아니면, 실제로 더 많은 음식을 먹게 하는 것입니다. 식품산업은 이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구사합니다.



세계 경작지에서 한해 생산할 수 있는 총 칼로리는 정해져 있습니다. 가공식품은 과도한 양의 칼로리 에너지를 소비하고 또 낭비합니다. 멕시코인이나 아프리카인처럼 옥수수를 직접 먹으면, 옥수수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옥수수를 소나 닭, 돼지에 먹이면, 에너지 90퍼센트는 잃어버리고 맙니다. 채식주의자들이 ‘음식사슬의 낮은 단계’에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음식사슬에서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음식 에너지 양이 10분의 1로 감소합니다. 한 명이 점심식사로 햄버거 1칼로리를 섭취했다면 옥수수 수만 칼로리를 낭비한 것 있습니다. 그 정도면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 배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헤겔(1770~1831)의 역사철학은 역사를 자유로운 의식의 진보 과정으로 보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사란 자유의식에 있어서의 진보 과정이며, 우리는 그 과정의 필연성을 인식해야 한다.” 근대 역사철학 자체는 진보라는 이념과 더불어 탄생한 근래의 사상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세상이 실제보다 이해하기 쉽고 설명하기 쉬우며, 결국 예견하기도 쉽다는 병리적 사고에 빠져있습니다. 적어도 역사에 변증법 같은 어떤 법칙이 있어서, 모순(혹은 대립)을 통해 인류가 고도 사회로 상향 발전한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작위적입니다. 















헤겔 사상에 반대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명의 진보가 우리 문제를 고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진보는 새로운 욕구를 가져다 놓으며, 새로운 욕구와 더불어 새로운 고통과 새로운 형태의 이기심과 부도덕을 가져올 뿐이기 때문이다. 소위 덕목이나 노동에 대한 사랑이나 인내, 절제, 검약은 세련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리라.”<잠언 1:18>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 또한 역사는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진보는 지속적으로 상향 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거대한 재앙 가능성을 동반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하는 것이 훨씬 올바를 것이다. 더 치명적인 세계대전, 생태학적 재앙, 인간이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들지도 모르는 기술 등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나리라 생각되는 악몽이 바로 그와 같다. 우리는 지난 묵시록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