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지였는지 우리나라 역사 교육의 문제였는지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덕혜옹주의 존재 사실 조차도 처음 알았다. 그냥 기억 속에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고종이라는, 어렴풋이 순종의 존재도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막상 그 분들의 자제들에 대한 생각까지는 못해 봤던 것 같다. 난리통이였고, 황제들의 나이가 많이 어렸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데 갑자기 2010년인 현재 100년 전의 덕혜옹주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너무 궁금해서 읽던 책들을 다 재치고 이 책부터 읽게 되었다.
정말 단숨이었다. 시작은 호김심이었지만 생소한 내용과 일본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나의 분노를 자아내며 나는 한시도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일제 36년의 치하 속에 우리 민족의 뼈 속까지 멍들게 한 아주 수많은 일들이 많았지만 내가 가장 분노를 느낀 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었다. 한 나라의 국모를 일본의 깡패가 아주 치욕적으로 죽인 사건, 얼마 전 뮤지컬에서 그 생생한 재연 모습을 보고 나는 충격에 사로 잡혔었고, 그 후로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심한 일이 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는데 덕혜옹주의 일생은 또 한 번의 충격이었고 또 다시 분노가 치밀고 일본에 대한 미움과 조정의 대신들 즉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에 대한 미움이 참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덕혜옹주 역시 명성황후 못지않게 속국의 옹주라 하여 더 많은 핍박과 무시와 급기야 일본으로 강제 이동 당하기까지 하며, 살아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새장 속에 울고 있는 새와 다를 게 없었다.
덕혜 옹주가 일본으로 가기 전 나 역시 그 구출 작전이 성공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랬는지 모른다. 제발 제 2의 명성황후나, 제 2의 아관파천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늘은 나도, 복순이도, 덕혜옹주의 편도 들어 주지 않았다. 세상의 바른 이치는 어디에 갔는지 무심한 하늘은 결국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데려가 버렸다.
나는 덕혜 옹주의 삶도 불쌍하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한 나라의 공주를 자신들의 정치적 뜻에 의해 마음대로 한다는 것에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이 정도인데 당사자인 옹주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고 원통했을까 생각하니 더욱더 맘이 짠하고 우선 나의 감정보다는 덕혜 옹주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원하는 왕관이고 명예였다. 처음 세상에 얼굴을 내 보였을 때 모든 백성이 머리 조아려 축하를 받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왕관이 없이 평범한 여자로 사는 소박한 꿈 조차도 꾸지 못하고 이루지 못했다. 결국 일본인과 강제 결혼을 했고, 사랑하는 딸이 조선인임을 거부하게 되고 옹주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충격에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녀에게 그 왕관은 한 나라의 공주라는 명예와 영광을 준 게 아니라 그 시대 세상의 아픔이 다 얹어진 아주 무거운 왕관으로 그녀를 짖 누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시간이란 참으로 묘한 힘을 가졌다. 지금 순간이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되기도 하며 미래가 되기도 한다. 그 과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지만 기억이라는 위대한 힘으로 인해 현재와 공존하기도 한다. 지금 나는 그렇다. 덕혜옹주라는 책을 읽고 있는 동안 100년 전에는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지금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 덕혜옹주가 살았던 100년 전 시대로 돌아와 있다. 그러면서 그녀와 함께 호흡하며 나는 조금씩 그녀를 이해하고, 때론 그녀가 되어 보기도 하고 그녀의 아픔을 함께 나눠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세상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스런 역사와 전통이 깊은 나라로서 다른 나라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게 된 것은 그냥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현재에 턱하니 데려다 놓은 게 아니라, 절대 일본에 타협하지 않고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던 옹주 같은 사람이나, 끝내 친일이라는 편한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받쳐서 독립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고통의 시간들이 흘러서 오늘과 같은 해방 되고 독립 된 나라에서 살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