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 부모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수없이 다짐하고 어렵게 감행했던 일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 사람들의 미움과 분노를 불러오는 일들. 그런 일들이라는 게 늘 뭔가를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침묵하는 편에 서게 되는 이유가 있다고 말입니다. 젊은 날의 결기나 기개 같은 것들은 스러지기 마련이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닐 거라고 말입니다. (p.42)
내 눈엔 모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친절이나 호의를 받을 줄 모르는 사람들. 선의나 진심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 무례와 몰상식이 몸에 밴 인간들. 그러니까 외지 사람들이 남일도, 남일도 할 때 그 남일도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p.56)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로소 희망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게 된 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p.72)
그러니까 감당도 못 할 일을 벌이고, 남의 돈을 제때 갚지 않고, 그래서 집이 넘어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는 무책임하고 한심한 사람들이라며, 아버지가 혼잣말을 할 때에 상상했던 그집 사람의 모습이 그날 내가 만났던 그 여자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그토록 상냥하고다정하게 누군가의 안부를 살필 줄 아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정말이지 짐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p.84)
3학년 8반 남토,
아이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게 남일동 토박이의 준말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 다. 누가 먼저 시작하고,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따져 물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내가 남일동에서 중앙동으로 온 것이 아니고, 중앙동에서 남일동으로 온 경우였다고 해도 그 애들이 그럴 수 있었을까요. (p.100)
도대체 내 부모는 왜 그토록 집을 가지고 지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걸까요. 당신들의 기대와 바람을 보란 듯 배반하며 어김없이 실망과좌절만을 되돌려주던 집에 대한 애착을 왜 놓지못했던 걸까요. (p.120)
오기와 고집, 집념과 집착에 가까운 그 마음은나라는 사람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건 집이 가져다주는 빛과 그늘을 헤아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p.123)
그러니까 그 순간 나는 남일동이 내 부모의 마 음 깊숙이 드리웠던 감정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이곳을 떠나려는 사람이나, 남으려는 사람이나. 어쨌든 여기 사는 동안엔 안고, 견디고, 마주 해야 하는 두려움의 감정을 새삼 상기하게 된 것 입니다.
오래전 어머니로 하여금 집 앞에 서서 멍하니집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던 그 조마조마한 마음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여기 사는 한 그런 마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것들은 저절로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고, 끝없 이 누군가에게 옮아가고 번지며, 마침내 세대를건너 대물림되고 또 대물림될 거라는 것을 깨닫 게 된 것입니다. (p.125)
수아를 나처럼 키우고 싶다는 그 말의 의미를나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 게 내가 아니라 내가 사는 중앙동을 염두에 둔 말 이라는 것을, 그게 네가 남일동에 살았다고 해도 그렇게 모든 걸 명명백백하게 따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라는 것을, 나는 시간이 훨씬 더 지난 뒤에 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p.139)
그러나 그 밤 나는 정말 없애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 안에 한번 똬리를 틀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고, 악착같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던 불안을 못 본 척하고, 물러서게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두려움을, 오래전 남일동이 내 부모의 가슴속에 드리우고 나에게까지 이어져왔던 그 깊고 어두운 그늘을 정 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