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여름언덕이라는 출판사에서 <반란의 조짐>이라는 책이 소리없이 출간되었고, 그 파장은 잔잔하게나마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르몽드 지는 보이지 않는 위원회라는 익명의 복수 저자들이 쓴 이 책을 두고 "권력이 이토록 두려워하는 책을 보기는 실로 오랫만이다" 라고 했다.
이 책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이 세계 어느 사회 사람들도 "자유롭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극소수 사람들이 권력과 부를 과점하고 나머지 사람들 대다수는 점차 그들이 펼친 그물망 속에서 소리없이 압살당하는 과정은 조지 오웰의 악몽이 점차 현실화되는 것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이 책은 이 시대, 이 행성을 뒤덮고 있는 암울한 절망의 그림자를 자아, 관계, 노동, 도시화(메트로폴리스화), 경제, 환경, 문명 등의 주제를 통해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지금의 유럽은 남들의 눈치를 봐가며 싸구려 할인매장에서 슬며시 장을 보고, 부득이 여행을 해야 할 때는 저가항공을 이용해야만 하는 영락한 이들의 대륙이다." 라는 말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고 미래가 없는 유럽 중산층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해주는 대목이다.
과거 사회를 지탱해줬던 집단적인 가치관, 더불어 삶, 모럴, 이상 등은 점차 폐기되어가고 개인은 낱낱이 고립되어가고 있으며, 도시화는 날로 가속되어 이제는 전통적인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무너지고 메트로폴리스(우리의 수도권에 해당함)라는,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이상한 형태의 도시권역이 대다수 사람들의 불모의 삶의 터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메트로폴리스에서 핵분열된 개인들은 그저 생존하기에만 급급하고 있다. 과거 유럽사회의 자랑거리였던 사회복지망은 이제 너덜너덜해져 누구도 미래의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게 되어가고 있으며 어디서나 실직과 빈곤과 질병의 파도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2006년 프랑스의 집권층은 경제적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인다는 미명아래 최초고용계약법을 통해 산업을 비정규직 중심으로 개편하려 했지만 학생시위대와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더이상 밀어부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앞으로도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이런 의도를 관철하려 애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젊은이들은 기존사회에서 써먹을 수 있는 인간으로 <동원되기> 위해 자기다움을 버리고 기득권자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자기의 얼굴과 몸과 마음을 갖가지로 성형을 하고 온갖 스펙을 쌓으려고 애쓰고 있다. 파편화된 이 젊은 개인들은 더불어 삶 같은 구호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며 그저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에만 급급하고 있다.
심지어는 환경조차도 기득권층의 입맛에 따라 편리하게 이용되고 있다. 과거 공업화를 통해 환경을 망친 주역이었던 이들은 이제 환경을 살린다는 미명아래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 권력을 다시 되찾으려 기도하고 있다. 과거에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그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을 도태시키고 그 흐름을 따르는 이들만을 선별적으로 동원하여 자기네의 부와 권력을 공고하게 했던 이들이 이제는 환경으로 그런 위치를 회복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압축한 용어가 <환경(을 이용한 )독재>다. 권력층은 환경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많은 이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부의 물고랑을 자기네쪽으로 다시 흐르게 할 수 있다.
이 책의 후반 부분에는 이렇게 암울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과 방법들이 나온다. 그 전략의 핵심은 코뮌주의다. 그리고 그 모델이 될 만한 것은 바로 파리 코뮌이다.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각성과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 형성되는 코뮌.
이 때의 코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코뮤니즘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이며, 이 책의 저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우리의 가장 고약한 적들>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좌익 파시스트들은 코뮌주의와는 아주 무관한, 아니, 가장 큰 적이라는 뜻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느 나라의 우익도, 좌익도 이 책을 아주 마뜩치 않게 여긴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조직화된 전체주의 세력이라면 어느 것이든 단호히 거부한다. 어용화되어 기존체제의 밑을 닦아주는 역할이나 하고 있는 사이비 정당들이나 노동조합들은 그런 세력의 전형이다.
좌익들은 이 책에 대해서는 아는 척도 하지 않으려 든다. 이 책이 매도하는 주요 표적의 하나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좌익들은 현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전도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책에 대해서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오히려 우익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네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불온한 세력의 의도와 방식을 잘 알아둬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코뮌의 주역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낱낱이 고립되어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이다. 저자들은 그 개인들이 자기네가 처한 현실을 뚜렷이 직시하고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이들과 열린 마음으로 교감, 교류하면서 자기네를 억합하는 체제의 힘으로부터 해방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애쓴다.
여기서 말하는 코뮌은 조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신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과거 서로 협력하고 품앗이하면서 공동의 생존을 도모한 농촌공동체 같은 것, 혹은 도시에서 낱낱으로 흩어져 살기는 해도 비슷한 현실인식과 이상을 공유하는 이들의 자유로운 집합, 혹은 어느 한 순간 한 장소에 모인 이들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생동하는 집단적 움직임 등.
이 책을 보다보면 이런 이야기의 현장이 유럽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서 새삼 기이한 기분에 젖어들게 된다. 과거 김영삼이 세계화라는 소리를 지껄일 때는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야, 라고 했는데 어느새 우리 사회도 명실상부하게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구나, 이제는 지금 우리가 겪는 현상이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이구나 하는 느낌.
그러면서 현시대 이 행성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원치 않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이런 현실을 빚어내려고 이토록 광분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음모론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유대자본의 세계지배 음모론도 그냥 참고사항으로 여기고 만다. 그리고 이런 세계를 만들어낸 주역들은 <반란의 조짐>을 쓴 <보이지 않는 위원회>처럼 보이지 않는 기득권 세력 정도가 아닐까, 하고 추정해본다.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아니, 이런 세계를 만든 이들은 게으르고 탐욕스러운 이들, 자기네가 지향하는 물질적인 목적과 목표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닫힌 이들, 나와 내 가정이라고 하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지향할 생각이 별로 없는 이들, 남들은 둘째치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이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자신도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암암리에 일조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주공산&사회적네트워크&2011년 4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