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와인을 마시는 이유?
다른 술이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친구라면 와인은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랄까?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을 만날지 완전 예측불허~ 처음 본 인상이 몇 마디 나눠보면 완전히 무너지는 수도 부지기수~ 아무리 좋아도 다시 만날 약속을 하기 힘들고~ 전에 만난 기억이 좋아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찾아가면 전혀 딴 사람이 되어 황당하거나 씁쓰레 발걸음을 돌리기도 하고~ 그래도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왜 그러냐구?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맛에 살라구?
바로 내겐 와인이 그렇다. 그래서 난 와인을 마신다.
서점에 있는 몇몇 와인책을 훑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몇 권은 샀다. 하지만 단 한권도 끝까지 읽지 못했다.
모두가 어디에 가면 반드시 무엇을 봐야 하고 꼭 누구를 만나야 하고 당연히 어떤 식으로 느껴야 한다고 쓰여진 여행가이드와 같았다.
개중에는 심지어 나는 이런 데를 갖다 왔다고 자랑하는 데 불과한 느낌을 받은 책도 있었다(물론 나는 스스로 그런 책을 사지 않는 최소한의 분별력은 있다고 여긴다).
최근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책에 흠뻑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에 대한 상상력이 현실을 넘어서 환타지수준이 아닌가(와인이 무슨 환각제도 아닌데).
이 책은 무엇을 보고 만나고 느끼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무엇이 좋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단지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고 최소한 이런 것을 알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머지는 마셔보고 각자 판단하라는 거다.
나는 이 책의 그런 점이 좋았다. 무슨 정석이 있는 식으로 주눅들게 만들지도 않고 이런 걸 모르면 마실 자격이 없다고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다른 여타의 와인책들이 팩키지 여행을 권장한다면 이 책은 일종의 와인 자유여행가이드랄까. 가서 풍토병에 걸리거나 험한 꼴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상식을 줄테니 나머지는 가서 겪어보면 안다는 거다.
나 같이 정장차림을 해본지가 언젠지도 잘 생각나지 않고, 깃발 꽂아논 곳에는 죽어도 가기 싫은 사람에겐 딱이다.
이 책의 첫 장은 '여러분은 옳다'이고 마지막 장은 '여러분은 여전히 옳다'이다. 그리고 이 책의 원제는 '와인,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내 입맛은 잘 안다(I don't know much about wine... But I know what I like)'라고 책의 서문에 써 있다.
'와인을 사서 먹는 당신이 와인의 주인이고, 와인의 맛과 가치는 당신이 결정한다'가 바로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시각이다(미각인가?).
원제를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다른 영어제목을 과감하게 단 것도 눈에 띈다.
"Shall we enjoy wine?"
"자~ 와인 한번 즐겨볼까요?"
멋진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와인에 대해 훨씬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