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자칭 역사 덕후라고 하는 저자가 한국 역사 속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이다. 우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원래 가로 69센티미터에 세로 23센터미터였던 그림이 추사의 손을 떠난 후 전체 길이가 무려 14미터가 된 사연이 주를 이루고 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청나라에 다녀와 귀중한 책들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상적에게 보은을 하기 위해 추사는 유배지에서 어렵게 구한 종이를 이어 붙여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세한도의 초라한 집은 추사가 유배되었던 장소를 보여주고, 변하지 않는 소나무는 이상적의 늘 푸른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이상적은 이 그림에 감동해 직접 중국 연경으로 가져가 비단과 두꺼운 종이를 발라 족자로 만드는 작업을 한 이후에 청나라 문인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들이 세한도에 사문을 덧붙여서 길이가 14미터에 이르게 된 것이라 한다. 또한 정감록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되고 있는데, 정감과 이심, 두 사람이 팔도를 유람하다 금강산에 올라 필담을 나누며 미래를 예언하는 형태로 서술되어 있는 책인데, 조선 시대 내내 금서였기 때문에 정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저술 연도도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정감록은 천문, 점성, 음양오행과 풍수지리 등 조선 시대 서민들의 관심을 끌 만한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특히 예언된 구원자로 나와 유명해진 정도령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다고 한다. 이씨 왕조에 의해 제거되거나 제거된 것으로 추정되는 뛰어난 인물 중에 유난히 정씨가 많았다면서, 정여립이나 정도전을 언급하고 있다.
첨성대는 우리나라에 남겨진 고대 건축물 중 재건 또는 보수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인데, 첨성대 중간 위치에 창문으로 보이는 가로, 세로 1미터의 사각형 구멍이 있는 곳까지 안쪽에 굵은 돌과 흙이 채워져 있다고 한다. 또한 지반을 든든히 다져 첨성대를 설치했고, 맨 위는 정자석으로도 불리는 긴 돌들이 우물 정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돌들의 배치를 통해 큰 지진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첨성대의 창은 외부를 보기 위한 게 아니라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구이며, 창 아래에 사다리를 안정적으로 댈 수 있게 인간이 홈을 만든 것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한편 황룡사지 9층 목탑은 자장대사가 당나라에서 수행하던 중 선인을 만나 9층 목탑을 지으면 온 나라가 평온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만든 것인데, 각층은 일본, 중화,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예맥을 상징하며, 신라가 물리쳐야 할 적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남의 묫자리에 자신의 조상 무덤을 쓰는 투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조선 중기와 후기 때 이러한 조상의 무덤과 관련된 송사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효를 강조하는 성리학으로 인해 양반들 사이에서 문중과 선산이라는 개념도 자리잡고, 풍수지리와 결합하여 묘자리가 조상에 대한 효의 차원을 넘어 당대의 부귀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면서 말이다. 노비들이 양반집 무덤을 파헤쳐 조상을 묻기도 했고, 권력을 가진 관리들은 탐해선 안 될 왕권까지 넘보며 왕실의 무덤을 침범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종 독살설에 대한 이야기도 전개되는데, 영조는 즉위하던 해부터 경종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되어 많은 소문에 시달렸다고 한다. 영조는 경종이 위독할 때 먹고 있는 약과 상극인 인삼과 부자를 사용하도록 해서 경종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자신의 대를 이를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 내용 중 제 8조는 조작설이 나돌고 있다고 하는데, 옛 백제 지역이자 오늘날 전라도에 해당하는 지역 사람들은 항상 배반을 일으키니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벼슬을 주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사실 풍수지리 관점에서 보면 후백제 지역인 금강 일대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형세지만, 경상도 지역인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또한 같은 형세이고, 고려 시대 내내 두 지역 인재들이 조정에 등용되었다고 한다. 훈요십조는 1100년 거란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곳이 신라계를 대표하는 인물의 집이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되었다는 명백한 물증은 없으나 심증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 밖에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했던 당나라 총사령관 소정방의 사망에 얽은 이야기도 언급되고 있는데, 중국의 기록과 달리 소정방은 당나라에서 죽은 게 아니라 신라 땅에서 김유신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현재 문경시청에 있는 "당교사적비"에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문경과 상주 경계에 있는 모전천에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그의 군사를 죽이고 이를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구체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중국 기록에는 소정방이 당나라에서 병사했다는 간략한 기록만 있으며, 소정방 무덤도 중국에서 찾지 못했다는 점도 같이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