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나서
선생님이나 변호사, 검사나 약사, 의사나 화가
엄마나 아빠, 또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먼지가 되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 아주 오랜 꿈은 먼지가 되는 것
아무도 모르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폴폴
어딜 가야 한다는
무엇 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빗자루에 휙 쓸려 쓰레기통에 담겨버려지기도 하는
또는 운 좋게 어느 집 방구석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십 년이고
가만히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필요도 없는
나는 먼지가 되고 싶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어요
<먼지가 되겠다> 전문
‘먼지가 되겠다’는 시인이 동시에게 쓰는 러브레터다. 시인에게는 ‘당신을 만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은 운명의 상대가 동시라는 말이다. 20대 시절엔 어떤 남자가 그런 운명의 상대였음을 고백하지 ‘아니’해도 우리는 알고 있지만(동시집<글자동물원>의 이안 시인과 부부임), 이번 고백은 그와 결이 다르다.
우리 대부분은 정도에 차이가 있으나 남에게 그럴 듯해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고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만 해도 초등학교 시절엔 피구할 때 도망만 다니느라 가슴 졸이지 않는 아이가 되고 싶었고, 중학교 시절엔 전날 방송한 드라마 줄거리를 드라마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들려주는 친구처럼 이야기솜씨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후로도 부러운 사람, 되고 싶은 모습은 넘쳐 난다. 그런데 시인은 동시를 만나고 그런 마음에서 풀려나 ‘먼지가 되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단다. 굳이 ‘무엇이 되지’않아도, ‘나는 나여도’되고 ‘나로써 충분’하다는 자존감을 고백함과 동시에 선언한다.
시집에는 이 작품 외에도 ‘모두 첫 아이’‘맘대로 거울’‘딱지 옆에 스티커’‘한 아이’ 등 자존감의 회복과 치유를 이야기하는 동시가 여러 편 있다. ‘안아주고 싶은 모든 시간에 바치는 말들’이라는 문구가 딱 어울리는 이런 동시들은 어린 독자뿐만 아니라 늘 비교와 경쟁 속에 바삐 사느라 아직 내면아이와 화해하지 못한 어른독자에게도 위로와 힘이 될 것 같다. 토닥토닥, 쓰담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