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을 전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으되, 내용에는 일체의 외압이 없음을 밝힙니다.
나는 컨텐츠 제작과 평론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때문에 “인공지능이 컨텐츠 제작자의 밥그릇도 위협할 것이다.” 라는 명제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동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다.
책의 주내용은 인간 각본가가 쓴 영화 줄거리 초안에 기반,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이 초안을 다듬고, 제목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영화’인 <남아 있는 것들>의 가상의 캐스팅, 배우 인터뷰, 스토리보드, 스틸컷, 스케치 등을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인간과 인공지능의 협업으로 영화 예술의 제작 방식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드는 느낌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주원인은 내가 살면서 접한 생성형 인공지능의 결과물들에서 느껴왔던 실망감과 일맥상통했다.
사실 인공지능 얘기를 하기에 앞서, 모든 것의 기초가 된 초안 내용의 허술함부터 지적하고 싶다. 왜 인공지능이 계약을 조기 해지한 고객 대신 일해서 고객의 위약금을 대납해야 하냐.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애당초 인공지능은 해당 계약의 주체는 아니었다. 계약의 주체가 아닌 존재가 왜 계약에서 정한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하냐. 각본 속 인공지능은 자아와 의지, 욕구를 갖고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인간을 해칠만큼 뛰어난 강인공지능이고, 위약금 대납 얘기까지 나오는 거 보면 재산권도 어느 정도는 인정받는 모양인데, 그렇게 잘난 인공지능이 어쩌다가 지하철 역 전광판에나 갇히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뒤로 줄줄이 나오는 그림들도, 그다지 인상적이거나 작품의 핵심을 제대로 전달하는 날선 느낌을 주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냥 인터넷 찾으면 쉽게 나오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든 첫눈에 예쁘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나사빠진 이미지를 보는 느낌 그대로였다.
더욱 결정적으로, 이 책에는 제작자 차원에서 던질 수 있는 더 깊은 수준의 물음과 그에 대한 답이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어찌어찌 만든 기초로 과연 실제 영화를 제작 가능할 것인가? 제작한다면 그 과정에 인공지능은 얼마나 어떻게 쓰이게 될 것인가?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재래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 것인가? 이런 물음들 말이다.
우리가 돈과 시간을 들여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궁극적 이유는, 인간과 인공지능 간에 누가 더 잘났는지, 누가 같은 일을 더욱 비용효율적으로 해내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가진 감성을 자극받아 감동을 얻고, 더 나아가서는 시대와 장소와는 상관 없이 유효한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다. 앞으로 해당 기술이 얼마나 발전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는 그러한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은 같은 인간의 손길로만 가능한 것 같다. 인간을 감동시키고 치유시키며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이끌 창작물을 만들려면 인간을 철저히 공감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현재의 인공지능은 그저 확률형 앵무새일 뿐이니까 말이다. 앵무새가 인간의 말을 따라한다고, 앵무새가 인간의 말을 인간과 동등한 수준으로 구사한다고 보는 멍청이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인공지능을 두고 그게 가능하다고 떠드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 당혹스럽지만.
인공지능이 창작을 ‘싸고 빠르게’ 해줄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경제 원리를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다. 인간의 마음을 매만질 수 있는 작품은 오직 인간, 그것도 뛰어난 인간의 손길로만 만들 수 있다는 평소의 생각을 더욱 굳힐 수밖에 없던 일독이었다. 그러니 창작자 제군. 세상이 뭐라 하건 신경쓰지 말고 정진할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