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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로로 중사의 망상공간
  • 번역의 탄생
  • 이희재
  • 16,020원 (10%890)
  • 2009-02-09
  • : 7,836

그것은 다름아닌 화폐 단위 표기에 대한 저자의 견해입니다.

문제의 책을 서점에서 본 게 2009년이었는데, 펼치자 마자 경제를 수박 겉핥기로 배운 저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 펼쳐지더군요.

"과거의 어떤 화폐단위도 현재 한국의 원화로 환산해서 표기하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사려는 생각을 접었던...


이게 왜 문제가 돼냐 하면 말이죠.

(1)정확한 환율 환산 자체가 의외로 매우 어렵습니다.

돈도 결국 가치를 표현하는 도구고, 그 가치는 자연적이고 내재적인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부여한 가치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어느 시대에는 비싸게, 어느 시대에는 싸게 거래될 수 있습니다. 과거 유럽 역사의 튤립 파동이나, 요즘 부는 가상화폐 열풍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특히 화폐 가치 격변기(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화폐 개혁, 경제 공황기)의 화폐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계산할 겁니까?

192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악의 탄생>에서 히틀러가 그러더군요.

"요즘 빵 한 개 가격이 무려 50만 마르크요!"

이 50만 마르크, 원화로 얼마로 번역하죠? 숫자가 50만이나 붙은 거 보니 되게 비싼 금액 같기도 하고, 빵 한 개 가격이라니 몇 푼 안 되는 금액 같기도 하고.

게다가 환율은 끊임없이 요동칩니다. 우리나라도 1997년 IMF떄는 1달러에 2,000원 가까이 찍었습니다.

머지않은 과거에 유럽에서 화폐 개혁을 했는데, 그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글도 이 주장대로라면 정말 옮기기 힘들겠군요.

"독일인 아이스너 씨는 은행에 200마르크를 내고 100유로를 환전받았다."가 "독일인 아이스너 씨는 은행에 14만 원을 내고 14만 원을 환전받았다."가 되어 버리니... OMG.


(2)화폐 단위도 그 화폐를 만든 사회의 역사고 문화입니다.

"1930년 미국 뉴욕시에 살던 마이클은 가판대에서 1달러를 내고 신문을 구입했다." 라는 문장은,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다음과 같이 고쳐져야 합니다.

"1930년 미국 뉴욕시에 살던 마이클은 가판대에서 1,200원을 내고 신문을 구입했다."

1930년대의 미국에서 원화가 통용되었나요? 아니잖아요! 왜 번역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하시죠?


(3)원작자가 파 놓은 문학적 장치가 무력화될 수도 있습니다.

"제이미는 미키에게 비상금으로 100파운드 지폐 3장을 주었다." 같은 문장이 제시되고, 극중에서 미키가 어떤 상황을 만날 때마다 이 지폐를 한 장씩 꺼내 쓰면서 위기를 모면하는 내용의 작품이 있다고 할 때,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참 웃기게 됩니다.

"제이미는 미키에게 비상금으로 16만원 지폐 3장을 주었다... 어라라?"

한국 돈에는 16만원권도 없고, 16은 100처럼 십진법으로 딱 떨어지는 수도 아닙니다.

원작의 금액값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경우에는 더욱 안 되는 말이구요.


(4)번역사의 인건비는? 독자의 실익은?

이런 부분까지 다 따져가면서 과거의 화폐 단위를 원화로 제대로 바꾸려면 경제학 석사는 돼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번역사가 이런 것까지 시간 들여서 환산하면 번역료 더 나오나요? 독자는 현대 한국의 원화를 들고 있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물론 원문의 작성시점과 번역문의 작성시점 간의 시간적 격차가 적고, 번역문의 수명이 짧고 용도가 비교적 실용적일 경우에는 원 화폐 단위와 원화 환산치를 병기하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전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1960년대 버스 요금은 5원이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은 300배 늘은 1,500원(제가 사는 경기도 시내버스 성인 현금 요금 기준)입니다. 그리고 종이매체는 최대 100년을 갑니다. 환율이 100년 후 어떻게 변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돈을 맘대로 번역 시점 당시의 원화 가치로 환산할 수 있습니까?


이 책을 보셨다는 분들 중에서 누구도 이런 부분을 문제삼지 않아서 장문의 글을 써보았습니다.

...뭐, 이렇게 적어도 악플(?)은 달릴 것 같지만. ㅋㅅ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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