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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로로 중사의 망상공간
  • 비스마르크를 격침하라
  • 앵거스 콘스텀
  • 25,000원 (750)
  • 2024-07-15
  • : 678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사실상 멸종한 해군 무기체계가 있다. 바로 그 전까지만 해도 해전의 끝판왕이자 오늘날의 전략 탄도 미사일 잠수함과도 같은 국가 전략병기로까지 여겨지던 전함(戰艦)이다. 모든 포함 중에 가장 두터운 장갑과 가장 강력한 함포를 지닌 전함은 평시에는 포함 외교(라고 쓰고 <포함 협박>이라고 읽는다), 전시에는 함대 결전의 주역을 맡아 맹활약했다.

그러나 전간기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한 항공모함은 해전에 제3차원을 부여하고, 함포의 사거리를 아득히 뛰어넘은 원거리까지 함재기를 이용해 무력과 정찰력을 투사하면서 전함의 자리를 위협할 잠재력을 보였다. 즉, 제공권 확보를 통해 제해권까지 확보되는 시대를 열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게 다름아닌 제2차 세계대전이었고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제공권을 뺏긴 전함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40년 11월 타란토 공습에서 그랬고,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에서 그랬다. 서 있는 전함 뿐 아니라, 전투 행동 중이던 전함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일본의 야마토급이 완성되기 전, 명실 공히 세계 최대, 최강의 전함이었던 독일의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네임 쉽 비스마르크 역시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나치 독일은 열강의 말석에 있었다. 다른 열강들에 비해 돈이 모자랐다. 이는 군비, 특히 돈이 많이 드는 해군의 군비에 치명적인 제약이었다. 그 결과 개전 당시 독일 해군은 사실상의 연안 해군 전력으로 강대한 대양 해군과 막대한 상선단을 지닌 연합군에 맞서야 했다. 개전 당시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해군에는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일만 남았다!”

그 말은 감히 개전 첫 해부터, 독일 해군의 귀중한 수상 전력 중 하나였던 순양전함 그라프 슈페의 자폭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비스마르크 역시 빈약한 전력으로 영국 해군 전체에 맞서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세계 최대, 최강의 전함이었지만 북대서양의 제공권 및 제해권을 장악하고 훨씬 많은 머릿수를 보유한 영국 해군에게 사실상 단신으로 맞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던 것이다.

책의 서술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못하다. 원래 전쟁이라는 현상 자체가 글로만 표현하기에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지휘소마다 지도가 있는 것은 전쟁을 가장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상당한 시각적 자료가 필요한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디테일을 너무 말로만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설명의 밀도도 너무 높고, 강약 조절이 잘 되어 있지 않아 이해하려면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격침당한 지 무려 83년이 지나서야 나온 최초의 한글판 단행본이라는 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본문에도 나왔듯이 이 사건에 대한 책이 해외에는 그야말로 천지삐까리인데 국내에는 이제야 처음으로 나오다니, 때늦은 감을 넘어 국내의 군사적 지성의 수준에 상당한 위기감마저 느껴진다. 번역 및 책의 만듦새 또한 훌륭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에 ‘공군’이 있었고, 장례식에서 해병대 ‘경호대’가 조총을 발사한다는 식의 황당한 표현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역자의 건승을 기원한다.

물론 이 책에도 번역 과정에서 생긴 옥의 티가 없지는 않다. 우선 도량형(임페리얼 스케일과 메트릭 스케일) 간의 환산 과정에서 버그가 많이 생겼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해군에는 구경 10.4cm 짜리 함포는 없었다. 800kg은 미톤으로도 불톤으로도 영톤으로도 0.75톤은 될 수 없다. 독일어 Dienst는 디엔스트가 아닌 딘스트로 표기해야 한다. 함재기가 함을 떠나는 것은 이함이 아니라 발함이다. 해군 내의 여러 병과가 동시에 참여한 작전은 합동 작전이 아니라 협동 작전이다. 원문의 오기였는지도 모르지만 타이타닉 호 잔해가 발견된 것은 본문과는 달리 1985년, 즉 비스마르크 잔해 발견 4년 전이었다. 그리고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원문을 찾아보고 싶은 용어들도 약간 보였다(예: 행정원사).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번역에는 합격점을 주고 싶다. 번역에 이 책의 반만큼도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책들이 한국에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는 소장가치 높은 귀중한 책이었다. 앞으로도 역자가, 그리고 한국 출판계가 볼만한 군사 서적을 많이 만들어내기를 기원하며 리뷰를 마감한다.


PS: 전쟁에서 중립국은 절대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도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PPS: 이 책을 읽고 시각적 목마름이 있다면 극영화 <비스마르크를 격침하라>, 다큐멘터리 <비스마르크의 비밀>의 시청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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