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군인은 출세를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군 조직은 그 속성상 예스맨을 선호하는 관료주의 사회다. 그런 곳에서는 주어진 임무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따져 묻는 부하보다는, 잘 나가는 ‘영감님’의 라인에 올라타 국가와 조직이 아닌 개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가 출세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속설이 통하는 사례는 나도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이 책을 보면 미군이라고 그다지 사정이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책의 주인공 보이드 대령은 분명히 뛰어난 전투 조종사였고, 현대까지 통용되는 여러 군사 이론을 정립한 브레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군인조차도 대령으로 군생활을 마감해야 했다는 데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제4차 산업혁명으로 전쟁의 양상이 격변하고 있어, 이러한 브레인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데, 더 이상 야망을 품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직장이 되지 못하는 한국군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말이다.
광고 문구와는 달리, 이 책의 면면을 뜯어보면 보이드의 ‘추종자’까지는 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묘사된 보이드는 ‘신탁을 전하는 사제’라기보다는, ‘지능과 똘끼가 업그레이드된 패튼 장군’ 같은 모습이었다. 즉, 이 책의 행간에는 보이드의 패착도 많이 묘사되어 있다는 뜻이다. 주어진 장비로는 실현할 수 없는 이론을 실무 조종사들에게 권하거나,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전투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기도 했다. 특히 전략적, 정무적 시각이 부족한 것은 확연했다. 뭐, 그래서 대령까지밖에 못 올라갔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꽤 좋아하는 영웅상(탁월한 능력은 물론 거칠고 속물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인간적 매력을 겸비한)에 가까운 인물인 것도 확실하다.
그럼에도 보이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사람이 개인이 아닌 국가와 조직에 충성했고, 그 충성을 위해 군 상층부 및 방위산업체와의 유착, 그리고 거기에서 따라오는 개인적 영달은 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헌신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전사로서의 기본 자세인 유연한 사고를 체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관료적인 군 조직에 몸담은 이들의 사고는 경직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전투에서 경직된 사고는 적에게 빈틈을 노출시키고 패배의 원인이 된다. 보이드는 전술을 다루는 사고방식도, 전투기의 기동도 모두 유연하기를 원했다. 어떤 작계도 실전이 벌어지면 그대로 풀려주지 않는다. 전사에게 유연하고 합리적인 사고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한 사고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그런 사고를 배양하는 법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라. ‘근육만 비대하고 골은 빈 마초들의 집단’으로만 여겨지던 미 해병대의 지적 체질까지도 개선시켜, 소속은 공군이지만 해병대의 일원으로까지 여겨지던 인물이니까.
책의 만듦새는 최근 본 군사 서적 중에 가장 뛰어났다. 독일어도 러시아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면서 독소전을 다룬 책이라던지, 기본적인 해군 용어와 사실 관계, 심지어는 숫자 번역도 못하면서 해전을 논한 책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었다. 이런 능력을 보유한 역자에게 일이 많이 돌아가야 하는데 싶어 안타까운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