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읽다 보면 느끼게 된다. 독서란 연결이요 리듬이라는 것을. 무심코 선택한 책들이 어느새 인가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사유를 위한 굳건한 주춧돌이 되어 간다는 것을. '무언가'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 '무언가'에 의해 이끌려간다는 것을.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던 곳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을. 그것이 보물섬일 수도 있고, 시골의 간이역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근래에 읽은 책들의 키워드는 -절대 나의 의도는 아니었다-'정상'과 '비정상'이었다. 정상이란 보통과 보편이라는 오래된 통념은 가차 없이 그리고 통렬하게 무너져 내렸다. 정상적, 일반적, 주류적이라는 것은 편향되고 왜곡된 인식이었다. 정상이라는 것은 차라리, 차별이요, 혐오요, 무시함과 나아가 모멸감이라는 사실에 망치가 아닌, 도끼에 찍혀 비틀거리게 했다. 꽁꽁 얼어붙은 '가난'이라는 2음절 단어에 대한 인식의 착각과 오류였다.
최현숙 구술 생애사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와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부터, 강지나 작가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그리고 홈리스 생애사 기록팀의 <힐튼 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그리고 장애여성공감의 <어쩌면 이상한 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서사였다.
비정상성으로 분류되는 노숙인, 생활 수급자 청년, 그리고 장애여성들의 생애사였다. 한낮 통계의 수치로 가감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반인 (二般人)이 아닌 일반인 (一般人) 고유의 삶의 생애사였다. 땀과 몸으로 쓴, 아니 육 (肉)으로 그린 누드 자화상이었다. 글이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손이 아닌 몸으로, 몸의 그리움을 그린 글이자 그림이었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그리움을 육필 (肉筆)로 그리고 쓴, 육화 (肉畵)였다. '나도 여기 있어요"라는 그들의 육성과 몸짓을 연출 없이 가감 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 또는 '르포르타주'였다.
<어쩌면 이상한 몸>은 '장애여성공감'이라는 장애여성 인권 운동 단체에서 펴낸 책이다. '국가 권력이 정해놓은 정상성에 도전하고 소수자를 억압하는 규범을 흔들고자 장애여성의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단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8인의 장애여성의 짧지만 긴 서사이다. 장애여성이 직접 쓴 글과 또는 구술로 이루어진 책이다.
책 제목은 단순하게 '이상한 (Queer) 몸'이 아니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을 이반적 (二般的 또는 離叛的)이라고 칭한다. 이는 일반적 (一般的)이라는 통념에 대항하여 사용한다. Queer란 단어가 광범위한 의미를 함유하는 것은 소수자들의 자조 또는 해학이거나, 정상인의 시각에서 본 비정상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책 제목에는 '어쩌면'이 덧붙여 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부분 긍정과 부분 부정의 '어쩌면'이라는 절묘한 형용사는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의 렌즈에 따라 이상할 수도,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쩌면'일 것이다.
이 책은 '장애 여성'이 아닌 '장애여성'을 -띄어쓰기 문법을 거부하며-사용한다. 장애여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고 장애+명사라는 구분 없이 하나로 연결된 언어로 이해될 수 있도록 붙여 썼다고 한다. 어쩜 우리 사회의 두 종류의 소수자가 하나로 뭉친 (어쩜 그래서 더욱더 비극적인) '장애여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장애와 젠더를 둘이 아닌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그들의 몸은 '어쩌면 이상한 몸'이 되었다. '장애가 없고 아프지 않은 상태'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장애가 있고 아픈 몸'은 '비정상적인 몸'이 된다 (P41)
'영감 포르노 (Inspiration Porno)'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가난 또는 장애를 지닌 이들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깨치고 나가 이긴 서사를 방송은 선호한다고 한다. 목적은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그게 '영감 포르노'의 효용이요 쓰임새이다. 이 책은 그것을 착취라고 말하고 있다. "장애인의 몸과 고난, 노력이 비장애인에게 삶의 동기 부여로만 활용됨으로써 장애인의 이미지가 착취된다" (P68)"
가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난 포르노 (Poverty Porno)'에는 공식이 있다. 아프리카의 기아에 죽어가는 아이를 위한 모금 광고에는 대부분 한 아이의 모습만이 클로즈업되어 비추어진다. 다수가 비추어질 경우 시각의 분산을 이끈다는 이론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가난 포르노'를 대하는, 보통의 정상성을 지닌 이의 대응 방법은 단 하나이다. 채널을 돌리는 것이다. 도저히 보지 못하겠다는 피동적 회피라기보다는,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능동적 회피의 심리이다. 위험을 감지한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파묻듯, 직시하지 않는 외면을 현실화한다. 직시, 직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회피하는 것이다.
정반대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시스템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를 이리 떼라고 비난하거나 가난한 자의 개인적 문제로 객관화시키기도 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혹은 흙수저 애들은 노력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답할 것이다. "당신의 말이 맞다. 그런데 누구나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똑같이 안 하고 못할 것이다"라고. 둘 다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을 개인적 문제로 객관화하는 것이 더 비겁한 짓이다.
애도하는 방법 또한 그러하다. 누구나 비극적 상황에 애통해 하며 슬퍼한다. 특히 죽음의 경우에는. 그러나 한편 그 애통의 마음 저편에는 나는, 그리고 나의 가족은 그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안도'의 마음이 애통을 압도한다.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애도 주관 기관에서 마련한) 영전에 바치는 것으로,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범인 (凡人)임에 자부심도 갖는다. 이것 또한 회피이다. 애도가 아닌 자기 위안이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에서 최현숙 작가가 말한 '가난'에 대한 질문은 이 책을 이해하기에 도움을 준다.
가난에 관한 질문들 가난한 이들에게 생애 이야기를 청하는 사람으로서, '가난'에 관한 내 궁극적 시선을 우선 밝힌다. 가난은 세상을 사는 온당한 존재 방식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가난은 경제적 가난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가난과 성적 가난 등을 포함한다. 가난 자체가 상대적이듯, 온당함 역시 상대적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일상 자체가 더 생태적이며 더 반자본적이다.
사회문화적으로 권력이 없는 사람은 해의 양과 질에서 덜 가해적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억압할 권력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가난은 잘 감당하기만 한다면 평화적이고 생태적인 존재 방식이다. (...)
다른 한편 '왜 가난한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난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라는 질문이다. 드물지만 '나 가난한 게 남한테 무슨 죄가 돼? 부끄러운 게 뭐 있어?' 하는 당당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빈곤 때문에 자신을 쓸모없고 실패한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고단한 노동과 싸구려 임금을 억울해하며 분노를 느끼는 사람은 드물고, 빈곤한 처지에 대해 자괴감을 넘어 죄책과 자기혐오까지 가지고 있다.
빈곤을 게으름이나 방종으로 분류하고 비정상과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보수 기득권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상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내면화되어 있곤 하다. (...)' 혹 세상의 희망이라면, 여전히 내내 잡초들이 희망이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p108~111 최현숙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서는 "빈곤이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 (P146)"로 규정하며, 가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도움을 주는 기관이 아닌, 성찰하는 힘'을 제시한다.
가난과 장애를 바라보는 자칭 '정상인'의 렌즈는 바뀌어야 한다.
'특별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 찬사하는 말 뒤에 숨은 사람들의 편견, 기구한 사연을 좇는 호기심 어린 시선에 마저려면, '평범하고 무난했다'는 달관이 필요하다. (P104)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보다는 '치료'라는 신기루를 쫓도록 하는 것도 폭력이다. (p111)
남성 중심, 비장애인 중심, 이성애 중심, 선주민 중심, 성인 중심 사회에서 소수자가 되는 개인이
스스로 노력하고 극복하는 것보다 사회적 인식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P83)
이 책을 단 한 줄로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다. '내가 걸을 때 함께 걷는 이들이 나의 속도를 배려해 주는 것' (P89). 그것이 지극히 비정상이지만, 정상이라고 우기는 이들이 새로 장착해야 할 사유와 인식의 렌즈이다. 그냥 자신과 같은 존재로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장애인이다. 그것도 몸도 마음도 가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