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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amwon님의 서재
  •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강지나
  • 15,750원 (10%870)
  • 2023-11-06
  • : 29,487


이 질문에 깊은 생각을 하고 답해보자.


"무절제, 방종, 중독은 가난의 원인인가?" 또는 "무절제, 방종, 중독은 가난의 결과인가?" "가난은 개인의 문제인가? " 또는 "가난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인가?"

어쩜 개인적 선호인 보수와 진보 이념에 따라, 가난과 빈곤의 원인과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자신의 신념이나 확신에 따라, 답과 결론은 극명히 달리할 것이다. 모든 가난의 원인을 능력주의 (Meritocracy)에 근거하여 개인의 게으름 자기 절제 등 개인적 문제로 돌릴 수도 있다. 또는 그렇게 만든 조건과 환경의 문제 인로도 볼 수 있다. 과연 가난과 빈곤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이 책은 8명의 청 (소) 년을 심층 인터뷰하여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라는 거대한 담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가난한 청년들을 알기 위해 등불의 스위치를 올리고, 깊은 사색을 시도한다.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집중한다. 가난한 부모 또는 조부모로부터 가정에서의 돌봄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의 자기 정체성 결여, 대인 관계의 기피, 자신감 결여, 실패의 두려움, '사회적 그리고 관계적 자본' 없이 사회에 덩그러니 던져진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눈에 띄는 작가의 결기도 느껴졌다. 가난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저자가 이야기했듯이 '빈곤층의 삶을 팔아 이용하는 것’이다. 비록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결국은 본인은 적극적인 관찰자 (또는 방관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조금 더 생각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영웅이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분장하기 쉽다. 그들의 삶을 팔고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서사가 되지 못하고, 본인의 영웅적 서사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정작 그들을 돕는 일에는 손을 떼면서, 남보다는 선한 사람이라는 상대적 우월감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우리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편견으로 그들을 지켜봐 왔다. 가난한 청년들이 고민하고 어려워하고 진정 바라는 것들은 그리 커다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말이다.

'누가 내 얘기를 들어주었으면 (P16)'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잡아주고, 힘든 삶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절박함 (P16), '교육과 돌봄의 공백' (P22) ' '스스로 견디는 삶' (P27), '관계 맺기의 어려움 (P29),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P29)' ' 관계망 (P37), 가족의 무관심과 방임 (P105), 자아 정체감 : '한 개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자아실현을 위한 일이 무언가에 대한 인식 혹은 사고, 출발점부터 불평등한 구조 (P158), 돌봄의 공백 (P166), 자아존중감 결여 (P230), 경제적 독립을 넘어서 심리적 독립 (P239).

빈곤의 대물림 문제는 경제나 사회 문제가 아닌, 집단구조 내에 뿌리내린 하위문화임을 서술하고 있다.

'하위문화의 특징은 운명주의, 무력감, 의존심, 열등감'이다. (P35),

문제행동이 하나의 습속으로 전수되는 양상이 현실적으로 관찰된다. (P36)

빈곤 대물림은 박탈의 경험이 대를 이어 축적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고착되는 과정이다 (P38), 경제력이나 가족, 배경, 학력 등 사회적 자본 없이 (P46),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P65),

생존 자체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합리적 판단을 하고 미래 지향적 사고를 할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P99),

자아존중감 찾기는 누구에게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P121),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가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으로 - 환경과 도움을 주는 기관이 아닌-'성찰하는 힘'을 제시하고 있다. "성찰하는 힘은 인간이 사회적,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자기 욕망과 사회적 위치를 사고하고 판단하는 내면의 성숙도, 즉 성찰하는 힘에 대해서는 참 소홀하다고 생각한다. (P97)

가난과 빈곤의 원인 결과의 끝없는 논쟁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의 제공의 실마리로, 스스로 생각하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생각과 사고의 근육을 키워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빈곤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이다. (P146)”라는 아마티아 센의 말은 울림이 크다. 박탈된 역량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성찰의 힘인 것이다. 그것이 진정 빈곤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호주나 미국의 원주민 (원주민이라는 말은 잘못 표현된 것이다. 맞는 표현은 원주인이다) 정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제한된 구역에 원주민을 몰아넣고 거주하게 하고, 먹고사는 것을 모두 해결해 준 결과, 다수가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자립하고 독립하는 자주/자조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어쩜 식민지 경영자 또는 점령자들은 의도적으로 원주인들의 성찰의 힘을 박탈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이 강조하는 시사점은, 경제적 지원으로 빈곤 해결을 갈음하고자 하는 행정 및 정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정체감, 진로 탐색, 성찰하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내면적 힘이 강해져야-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단단해진, 상처가 아물어 딱딱한 딱지가 내려앉듯,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과제이다. 그것의 출발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책일 수도 있다.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격언이 다시 다가온다.


누구나 자신의 삶은 고유하고 특별하다. 반면 세상에 태어나 맞닥뜨린 환경과 상황은 모두 상이하다. 누군가에 주어진 하루의 시간은 동일하며, 그 시간을 어떻게 밀도 있게 보내느냐는 각자 인간의 몫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은 구축되어야 하고 지원해야 한다. 삶의 시간을 얼마나 농밀하게 보내느냐는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각자 개인이 헤쳐나가야 할 책무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무척이나 불운한 이들에게 어떻게 성찰의 힘을 배양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결핍은 불운이지만,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어느 젊은 노숙인 청년의 사례가 생각난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 알코올 중독에 노숙인의 신분이 되었으나, 인문학 강의를 수강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사이버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에게 삶의 지향점인 목표를 설정하게 해준 것은 바로 인문학의 힘이었다. 그것이 저자가 이야기한 '성찰의 힘'을 기르게 해준 것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두 다리에 힘과 근육을 키우게 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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