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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amwon님의 서재
  • 해방의 밤
  • 은유
  • 16,200원 (10%900)
  • 2024-01-15
  • : 9,169


  • 은유(隱喩)


  • 은유 (隱喩)를 영어로는 무엇이라고 할까요?라고 물으면 웬만하면 메타포 (Metaphor)라고 답한다. 그럼 직유 (直喩)는 영어로 뭐지요?라고 물으면 멈칫한다.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Input이 없었으니 output도 당연히 없다. 직유는 영어로 Simile이다. 뭐, 그냥 하는 이야기다. 그걸 몰라도 직유법을 사용하며, "너는 별과 같아"라고 말하고 글을 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근데 영어 단어만 보아도, 시밀레보다는 메타포가 달라 보인다. 품위가 있어 보인다. 숨김과 단도직입의 차이라고나 할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듯 드러내는 은유가 한 수 위인 것 같다. 은유 작가의 매력 또한 은유이다.



    은유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궁금했다. 직접 질문을 해보았다. "필명은 어떻게 은유라고 지으신 건가요?" 답은 아주 간단했다. "제가 은유를 좋아해서요" 맥이 풀렸다.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저 허물어졌다. 그러나 은유 (隱喩)라는 필명 (筆名)은 참 잘 지은 것 같다. 그가 펴낸 책을 그래도 많이 읽었다는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은유란 본뜻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유는 직유보다 강하고 힘이 세다. 소소하지만 그 소소함 속에 숨어 있는 소소하지 않은 글의 힘을 발휘한다. 소소 (小少) 하지만 소소 (素素) 하게 하얀색이다. '이것이 답입니다'라는 해법이 아니라, '이걸 생각해 보세요.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질 겁니다'라며 넌지시 손을 내미는 은유 (隱喩), 그것이 은유 작가의 매력이다. 최고의 강점이다.



    2. 울컥


    은유 작가는 어느 책에서 '울컥이란 존재의 딸꾹질'이라고 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울컥' 무언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을 많이도 받는다.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 버리거나, 흘러넘칠 것 같은, 인간의 심상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만큼 그의 글은 독자들의 마음과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독자는 이런 심정일 게다. 마치 몰래 숨어 먹다가 들킨 아이의 심정처럼 "너도 그랬구나. 나만 그런 줄 알았어"라는 동류의식과 동지의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울컥'을 촉매로 글을 쓴다. 독자를 울컥에 젖게 한다. 나와 다름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평안과 편안함을 선사한다. 앞으로 모았던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의 손을 잡게 한다. 작가의 이야기는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은 말씀하셨다. "어떤 이의 죽음은 숫자로 표기되고, 어떤 이의 죽음은 서사로 기록된"라고. 바로 은유 작가는 서민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따스한 손을 내미는 같은 서민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서사로 둔갑시킨다. 주인공이 되게 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아주 자주 '울컥'한다. 울컥은 존재의 딸꾹질이 맞다. 나도 존재하는 존재임을 알게 하며 몸은 울컥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작가도 고민 많은 엄마이고, 독자도 그런 엄마이고, 식탁이 글을 쓰는 책상이 되고, 작가와 독자가 상호 빙의하며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



    3. 결코 소소하지 않은 소소함


    그의 글은 레토릭이 아니다. 호흡이 급하지 않다. 그저 소소 (少小) 하고 소박하고 투박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너무도 하얀 소소 (素素) 한 글이다. 생각의 여백을 제공한다. 여백이란 채우지 않고 일부러 비워둔 공간이다. 여백은 하늘고, 구름도, 물도 된다. 채우지 않은 나머지는 모두 여백이다. 남는 것이 아니라, 남겨둔 것이다.


    그의 글이 그러하다. 거창하지 않으나 긴 여운이 서사를 벼리고 빚어낸다. 작은 송편이나 거친 수제비 같지만, 그 음식은 위로와 위안의 말로 허기를 채우게 한다. 현학적인 글이 아니다. 다만 어휘와 말투가 단정하고 정갈하다. 그만큼 퇴고의 고통을 많이도 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글에는 녹지 않은 미숫가루의 떡진 분말은 없다. 그의 글은 넓고 깊다. 그 힘은 그가 시를 많이 읽었고 철학 책을 끼고 살았기 때문이리라. 그 사유의 날갯짓으로 소소하지만 선한 영향력의 전도사가 될 수 있었으리라.




    <해방의 밤>에도 많은 밑줄을 그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극심한 휘발성 때문에 이별을 고하겠지만 조금 더 머물러 있으라고 여기에 옮겨 본다.


    내 삶은 책기둥에서 시작되었다 P5


    훌쩍훌쩍 울컥울컥 10년 ... 식탁을 책상 삼아 밥을 짓고 글을 썼다 P9


    큰 아이는 올해 어버이날에 이렇게 썼다. 

    "2020년 11월부터 삶에 책을 들이고 2021년 5월부터 삶에 글을 들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차곡차곡 일과 삶의 대전제들, 즉 변하지 않고 사고의 기준이 되어줄 것들을 쌓아왔습니다. 문장을 수집하기도 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기도 하면서요. 돌이켜보니, 어머니의 말들, 삶의 고유성과 구체성을 이야기하는 것, 타자의 삶에 공감하고 그들이 되어 보는 것, 불행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더라고요.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해피 어버이날" P15


    내가 세운 자취의 목적은 두 가지다.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고요한 단독자'의 사간을 늦게라도 살아보는 것. 그리고 <반사회적 가족>을 교본 삼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중산층 가족을 가족 외부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해 볼 기회를 갖는 것 P43


    <욕구들>의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뻥 뚫리는 말입니다. '하지 마'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사랑눈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중에'라는 시간은 영영 도래하지 않으며 지금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해도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증여이고, 원함에 관해 아이들이 본받을만한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에 비해 모자람 없는 어머니의 일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P55


    사람은 잘 안 변한다고 하잖아요. 대개는 그렇죠. 그런데 한 존재가 자기를 겪게 바꿔내는 계기가 두 가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사랑으로 아플 때,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할 때. 그래서 사랑을 쉽게 하고 돈을 쉽게 벌고 그러면 좋겠지만 타자 경험의 기회가, 즉 다른 내가 되어볼 계기가 없다는 측면에서는 그리 좋은 삶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P67


    삶은 그저 삶일 뿐이지요. 늘 고난이 있습니다.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고, 저는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할 테니까요.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친절은 우리가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어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친절도 매우 주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친절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선택이기 때문에 저는 친절에 대해 쓰는 것이 좋습니다. P107


    일상의 속도 제어 장치로 시를 들였다. 시는 산문이나 소설처럼 논리적 사고로 읽어낼 수 없는 장르거든. 읽다가 요철처럼 걸리는 구절이 있어서 생각도 서행을 한다. 행간에 머물지. 이게 뭐지? 왜 슬프지? 이거 좋다! 이런 느낌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지. 삶을 그냥 살아내야 하듯이 그저 읽어내면 되거든. 논리적 이해가 아닌 묵묵한 독해. 안 보이는 것이 보일 때까지 붙드는 마음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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