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 아니라 살아가기, 표류가 아니라 항해하기.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가수 김윤아의 ‘가끔씩’이라는 음악을 듣는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일까
살아 있는 꿈을 꾸는 것일까
나는 살아가는 것일까
그저 살아지고 있는 것일까
음악도, 가사도, 목소리도 너무 좋다. 내 마음을 너무 잘 알아주는 것 같아 위안도 된다.
문제는, 음악을 듣고 나면 적극적으로 살아봐야겠다는 의지는 생기는데,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일도 열심히 해보고, 공부도 열심히 해보고, 책도 많이 읽고, 친구도 열심히 만나보지만, 여전히 나는 흘러가는 시간에 삶을 맡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에게 한줄기 빛을 보여준 것이 바로 <열한 계단>이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표류하는 삶이 아니라 항해하는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이 단순히 사회적 성공이나 부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채사장은 저렇게 간단히 말했지만, 나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사회적 성공을 향해 노력하는 삶이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삶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표류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깊은 고독 속에서 내면으로 침잠해 가는 시간과 마주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내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임을 말이다.”
아, 내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나 보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추구했던 것은 전부 외적 성장뿐이었다. 내가 읽은 그 수많은 책들은 나의 우물의 깊이를 깊게 해주는 편한 책들이었을 뿐,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 불편한 책들이 아니었다.
좋은 책을 소개하는 책은 참 많다. 좋은 고전을 소개하는 책도 참 많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한 인간을 표류하는 삶에서 항해하는 삶으로 변화시켰는지, 그 부끄러운 과거와 아름다운 변화의 과정을 이렇게까지 담담하게 얘기해주는 책은 드물 것이다. 채사장의 인생을 들여다 본 느낌이다. 즐겁고 고마웠다.
마냥 사회적 인생과 성공을 무시하고, 내면으로만 파고들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한량-관직이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괜찮았지만 슬프게도 지금은 안되는 인생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한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방법을. 나도 내면으로 파고들어, 문학과 종교, 철학과 과학, 이상과 현실, 삶과 죽음의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 가야겠다.
<열한 계단>을 덮고 나서, 첫 번째 계단인 <죄와 벌>을 펼쳤다. 문학소녀를 꿈꾸던 어린시절, 읽은 듯 읽은 거 아닌 읽은 것 같은 소설을 다시 한 번 차분히 읽어 봐야겠다. 그리고 나만의 계단을 만들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