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게 딸이 있었다면? 그 딸이 얼굴에 붉은 반점이 있고, 다리를 전다면? 히틀러는 그 딸을 어떻게 했을까? 그 딸에게 히틀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딸은 아버지를 얼마 만큼 알고 있었을까? 딸은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이런 상상과 질문들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질문은 필연적으로 이렇게 끝날 것이다. 만약 히틀러가 내 아버지라면?
어릴 적 내 아버지가 남모르는 왕국의 왕이고, 내가 잠깐 양부모 밑에서 키워지고 있었다가 어느 날 긴 행렬이 나를 모시러 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본 기억이 있다. 내가 공주라는 가정을 해보는 것이다. 혹은 반대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어른들의 농을 들으면서는 혹여 내가 다리 밑 움막 거지의 자식인 건 아닐까 상상하며 흠칫 놀라기도 했다. 상상은 늘 거지에서 끝이었다. 그러니,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우리들 대부분에게 히틀러의 자식이라는 상상은 차라리 경악이다. 희대의 살인마의 자식이라는 가정이라니!
이 책에서는 안나가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친구들에게 히틀러의 딸 하이디에 대해 이야기를 꾸며내어 들려주는 '하이디 이야기' 한 줄기와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에 잠기는 '마크 이야기' 한 줄기가 나란히 흐른다. 그리고 마지막은 안나와 하이디의 관계에 관한 암시로 마무리된다. 마치 추리소설 같기도 해서 흥미진진하지만, 결국 책의 메시지는 전술한 것과 같은 질문이다.
주로 마크에 의해 제기되는 질문들. 마크는 속절없이 비를 맞고 선 소들을 바라보면서 뭔가 슬픈 느낌을 가진다. 그건 어쩌면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떠밀리는 독재치하의 힘없는 사람들, 진실이 뭔지 모르고 휩쓸리는 대다수 우중들에 대한 느낌과도 같았던 모양이다. 마크의 눈에 소들이 자주도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마크는 자꾸 엄마, 아빠, 선생님, 이웃 아주머니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히틀러가 유대인이나 장애인에게 그렇게 심하게 군 이유가 뭐였을까?"
"자기 아버지가 히틀러 같은 짓을 한다면,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와 자식은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질러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할 수 있을까?"
"자식은 부모의 성격을 닮는 걸까?"
"히틀러나 폴 포트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고 있었을까?"
"옳은 일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라 전체가 그른 일을 할 수도 있을까?"
"누군가 군대를 만들어 내게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지금은 우리 사는 세상에서 대량학살이 사라진 걸까?"
"우리 부모님(우리 민족 또는 국가)은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이 없을까?"
"나의 삶에는 죄가 깃들어 있지 않은 걸까?"
"독일 사람들은 모두 히틀러에게 진심으로 동조했을까?"
"왜 사람들은 힘을 합쳐서 히틀러에게 대항하지 않았을까?"
"히틀러의 딸을 만나면 우리는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까?"
책에 나오는 어른들 모두 마크가 하는 질문을 난처해했듯이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은 아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생각해보자고, 오래 생각 좀 해보자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다만, 저런 질문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사실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책의 배경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백인들 역시 원주민의 삶의 터전을 앗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선조들도 숱한 살육전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해갔던 이들이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히틀러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모든 폭력, 살육, 독재는 암암리에 어느 곳에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느 곳에나. 예외 없이.
도로시가 오즈의 나라에서 에머랄드 안경 덕분에 세상이 모두 에머랄드 빛으로 된 줄 알았듯이 거짓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진실을 꿰뚫어보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또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양심껏 살기는 더 어렵다. 게다가 혈육간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행동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더욱이 하이디 같은 갇혀 지낸 어린아이라면 더욱.
도대체 하이디는,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다른 이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여 우량 민족을 만들겠다는 미친 독재자인 아버지가 남몰래 키우던 아이, 하이디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하이디같은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져야 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히틀러가 하이디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틀러에게는 아버지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다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이라면 그 아이를 치부를 감추듯 숨겨 놓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자식과 똑 닮은 다른 아이들을 살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 여기듯 하면서 '내 자식의 안녕' 운운하는 것은 결코,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 결코.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런 사람에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 기분이 이상해지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