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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진님의 서재
  • 유의미한 살인
  • 카린 지에벨
  • 12,420원 (10%690)
  • 2018-10-31
  • : 198
안경을 쓰고, 밤색의 긴 생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고 다니는 잔느는 경찰서 지원실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새 옷과 새 신발을 싫어하고,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도 싫어하기에 미용실에 가본 적도 없는 여자.



남의 이목을 끄는 것을 질색하는 아니 두려워하는 여자.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면 못 견디는 여자.



퇴근길엔 항상 17시 36분 기차를 타는 여자.



제일 먼저 타고, 제일 먼저 내려야만 하는 여자.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제일 구석 자리에 자신의 지정석을 정해놓은 여자.



핸드백이 잘 잠겼는지 몇 번씩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여자.



자기 자신과 육성을 터트려 대화를 나누는 여자.



잔느는 평범해보였지만 확실히 이상한 여자였다.









어느 날, 잔느는 항상 타는 17시 36분 기차 자신의 지정석 옆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한다.

그것은 잔느 자신에게 온 러브레터였다. 자신을 엘리키우스라고 칭하는 사람에게서 온 러브레터.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잔느 ....

당신은 이미 내 얼굴도 내 목소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달콤한 사랑 고백에 잔느는 설렘을 느낀다.



엘리키우스는 누구일까.



다음 날 퇴근길에 또 다시 발견한 러브레터.



잔느의 설렘은 공포로 변한다.



엘리키우스가 자신이 한 살인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리키우스는 잔느가 일하는 경찰서의 에스포지토 반장이 쫓고있는 연쇄 살인범이었다.







엘리키우스는 잔느가 자신을 이해할거라고 말한다.

자신을 차차 알아가게 될거라고, 또 최후에는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자신은 살인에 미친 살인마가 아니며,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잔느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뿐이라고 해명한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우리는 자유로워 질거라고 자신을 믿어달라고 속삭이는 엘리키우스 .



러브레터를 받으면 받을수록 잔느의 고뇌도 깊어진다.



'신고를 해야한다'



하지만 마음 또 한 켠에서는 엘리키우스를 따르고 싶다.



아슬아슬한 편지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녀는 엘리키우스에게서 시인같고 순수한 청년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와 함께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엘리키우스는 잔느와의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잡히게 될까.





#







잔느는 조현병을 앓고 있다.



또한 미셸이라는 악몽에 시달리며 미셸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랬던 잔느가 자신을 조금씩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고, 상대의 말을 맞받아치기도 하는 잔느의 모습을 응원했다.



엘리키우스가 원했던 대로, 엘리키우스 덕분에. 잔느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희망적이었다.







잔느가 엘리키우스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던 것처럼



나 역시 결말에 해당하는 21장과 에필로그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너무나 안타까워서.



엘리키우스는 가해자들 때문에 삶이 망가져버린 자신과 잔느의 복수를 이루었다.



자신의 정의를 실현시킨 것이다.



게다가 잔느와의 유대감을 형성했고, 잔느의 사랑도 얻었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유의미한 살인이기는 했다.





허나 그의 복수는 그들에게 파멸만을 가져 왔을 뿐이다.



엘리키우스도 잔느도 이전보다 더 처참해졌다.(글쎄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정말 무의미한 살인이 아닐 수 없다.





모든 문학 작품은 읽고나면 어느 정도의 여운을 남기는 법이지만



유의미한 살인은 특히나 그랬던 소설이다.







여운은 내 사고를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시켰다.



1

잔느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호기심과 설렘을 느끼고

엘리키우스는 나를 알아 줄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잔느가 자신의 기차 지정석에서 자신에게 온 러브레터를 읽었을 때,

그것이 단순한 러브레터였다면 이야기의 흥미는 시들했겠지만

잔느와 엘리키우스는 행복했을 거라는 공상을 해본다.



2

분명히 그들은 피해자이지만 가해자들보다도 더욱 처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비극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피해자를 대신 해 처절한 단죄에 나설 엘리키우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이었다면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











잔느에게서 세 남자가 보인다.



그립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과거의 잔느, 미셸



잔느와 데칼코마니 같은 아픔을 가진 엘리키우스



잔느의 또 다른 목소리, 자유로워진 잔느의 목소리, 에스포지토.





모두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원제인 Terminus Elicius (종착역 엘리키우스)를 떠올려보면 아렸던 마음이 묘하게 조금 안정이 된다.



덜컹 덜컹 기차의 움직임이 잔느를 안심시켰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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