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보다
종이책으로 보아야 그 맛을 제대로 음미 할 수 있는 책들이 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그림책이나 만화책, 사진집들이 그렇다.
<어쩌겠어, 이게 나인 걸!>도 '종이책으로 보아서 참 좋다.'라고 생각한 책이다.
'읽는다'는 말보다는 '본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책.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두 분이서 쓴 책답게 상당히 눈이 즐거웠다.
부드러운 상아색 바탕 가운데에 선인장 옷을 입은 사람이ㅡ선인장씨라 칭하고 싶다.ㅡ
앙증맞게 윙크를 하고 있는 표지를 보고 있노라면
뾰족한 선인장 가시의 날카로움이 무색할 만큼 마음이 말랑해지는 책
#초상화
사실은 그랬다.
책을 읽으며 주변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 이건 엄청 까칠한 A이야기인데?'
'이건 소심한 B이야기잖아?'
뿐만 아니다.
책을 읽으며 '누가 내 이야길 써놨네'싶어서 얼굴리 붉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공감하고 반성하고 위로하며 책을 보다보니
어느새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편해졌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 항상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스물두 살 가을, 내 자신에게 선물한 로켓 팬던트 목걸이에 이렇게 적어 뒀었다.
'32살, 좋은 사람'
내가 10년 동안 이루고 싶은 것을 적어둔 것이었다.
이미 사람의 형태를 갖춘 채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것에 부합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좋은'이라는 형용사였다.
상당히 주관적이고, 아주 포괄적인 이 단어를 정의하게 위해서는 수많은 예문이 필요했다.
-어지러운 인생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
-내 뒷담에도 '그랬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는 관대함
-배려,친절,책임감,자존감 등....
이렇게 수많은 잣대에 나를 맞추려다 보니 결국 나는 줏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설프게 착했고, 그런 나에게 지쳤다.
그래서 목걸이를 선물한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 지망생'일 뿐이다.
나는 그런 나를 상당히 아니꼽게 생각했는데, 이 책이 나에게 그랬다.
"어쩌겠어, 그게 너인 걸!"
살짝 기분이 나빴으나, 이내 굉장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배 째. 어쩌라고 이게 나인 걸!"
#아쉬웠다
나는 수 년 동안, 수많은 내 모습들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위로받기 위해 택한 이 책은
내가 나쁜 맘을 먹어도, 조금 얄밉게 굴어도, 때로는 바보 같을 때에도
-괜찮아. 그게 너인 걸
-모두들 그래
-조금 나빠도 돼
하며 일관성 있게 내게 공감해주는 책이었으면 했다.
(안다 내 욕심인 것을. 세상 사람이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책의 비일관성과 뻔한 교과서적 내용이 내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했다.
키스를 글로 배웠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책'이 위로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까칠해도 괜찮아-
라고 했다가
-모나고 싶어서 모난사람은 없어, 다듬어져 가다보면 점점 둥글어 질거야. 내일은 조금 더 둥글게 살아보자-
라고 했다가
또
-마냥 착한 척 웃어 보일 필요는 없다-
라고 말하는 책에게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해?"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책이 내게 이럴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게 삶인 걸.
#또 아쉬웠다
이 책에서는 행복을 강조한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소확행'이라는 의미에서의 행복이겠지.
하지만 행복타령은 이제 지긋긋한 것이 사실이었다.
"왜 사니?"
"응, 행복하려고."
8090시절의 모범답안은 이제 그만 퇴장 해주었으면 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니...
(굳이 '행복'과 같은 잣대를 들이민다면 행복보다는 '만족'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행복하지 않으면 삶의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행복'이라는 지점이 당도 할 수 있는 것이기나 한가?
사실 우리는 그냥... 사니까 산다.
삶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화날 때도 즐거울 때도
모두 온전한 내 삶이다.
지금 이 순간,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는 꾸준히 삶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들숨 날숨 마다 나를 격려 해주고 싶다.
"나 녀석 참 잘 살아가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꼭꼭 씹어 읽는 편이다.
재미없는 책이라도 구태여 참고 읽어내는 편이다.
200쪽 정도의 책에서 단 한 줄이라도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문장을 만났을 때의 그 기쁨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빠르게 급변하는 시대를 사는 사람이
이렇게나 효율에 재능이 없어서 어쩌나 하고 스스로 걱정할 때도 있지만
오늘과 같이 책 속에서 좋은 문장을 만나는 날이 있기에 과감히 효율을 등질 수 있게 된다.
나도 혼자 있고 싶어서 혼자가 되었으나 외롭다는 감정을 느낄 때가 있었다.
맞다. 혼자여서 외로웠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 조차 없기 때문에 외로웠던 것이었다.
혼자서 <어쩌겠어, 이게 나인 걸!>을 읽은 오늘, 나는 혼자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외롭지 않았다.
내 안에 내가 꽉 들어차서 함께 독서를 했다.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함께 채워준 이 책에게 고마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