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모든 작가의 소설에는 이상한 따뜻함이 있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일종의 긴장감 같은 게 유지되는데, 그 긴장감은 『안락』에서나 이 작품에서나 관계, 타인에 대한 관심을 통해 유지된다. 마치 작가가 극적인 장치, 묘사 혹은 누군가 해하는 표현 없이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증명이라도 해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안락』에서는 할머니의 죽음, 이 소설에서는 해미의 연락두절과 같은 긴장감 유지 장치 같은 게 있지만, 그 장치는 소모되거나 파국으로 끝나는 법이 없고, 그냥 말 그대로 이야기를 나아가게 하고 최소한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치로서만 기능해서, 이야기의 따뜻함을 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따뜻함이라는 건 굉장히 모호해서, 자칫하면 신파, 혐오, 연민 등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은모든의 시선은 그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이 소설의 주인공인 경진의 태도와 행동이 연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하게 자꾸 별로 안면도 없는 사람들이 경진에게 자신의 고민거리를 털어놓는데, 경진은 '이 사람은 또 왜 이러지' 하면서 항상, 결국 그 말들을 끝까지 듣는다. 경진은 판단하지 않고 기다리고, 질문한다. 경진이 자신의 말을 앞세우고 기다려주지 않는 딱 한 사람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인 해미인데,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해미에게도 '짐작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준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정세랑 작가 표현처럼) '고요한 집중력으로 듣는 행위'에 대한... 깊으면서도 편안한 경험이다.
세신사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라고는 딱 두 종류뿐이었다고 했다. 그중에는 계집애가 해 지고 나서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거나 문지방에 앉지 말라거나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난다는 말처럼 뭔가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머지는 큰언니를 도와서 동생들 저녁을 먹이라거나 숙제를 마쳤으면 앉아서 마늘을 까라거나 하는 뭔가를 해 놓으라는 말들, 다시 말해 "네"라고 대답하면 그걸로 끝인 말들뿐이었다. (...) 다만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는 다른 성장기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틈날 때마다 최대한 다양한 질문을 하려 애썼다고 했다.-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