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돌아가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세상을 떠난 두 동생과 함께 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철없던 어린 시절 이었지만 유독 냉정하고 배려심이 부족했었다.
부모의 불화로 돌봄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서로 기대어 살던 오 남매!
내가 지금같은 마음이었다면 얼마나 보듬어주고 살펴주었을까. 하지만 나도 그 때는 힘들었고 외로웠다.

그렇게 두 동생을 보낸지 20여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도 내가 하늘나라고 떠나는 날까지 이 그리움은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모양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을 그리워하며 이 소설을 썼다니..
이렇게라도 죽은 영혼을 위로할 능력이 있는 소설가이니 다행이지 않은가. 나는 그것도 못하는데.

착하고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었다. 파니는.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정신적인 문제와 조울증 문제를 겪었던게 아닌가 싶다.
어제 보았던 TV프로그램에서 의사인 여 에스더는 자신이 우울증 환자이고 전기충격을 뇌에 가하는 치료를 받을만큼 극심하다고 고백했다. 의사여도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만큼은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말이 가슴에 남았다. 우울감과 우울증은 다르다고. 우울증은 질병이라고.
나도 우울증을 앓고 있고 어려서 몰랐지만 우리 가족들은 우울인자를 타고났던 것같다.

그런 동생을, 딸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조바심과 세심함이 느껴졌다. 명랑하게 수영을 하고 재잘거리면 안심을 하고 집안데 갇혀 숨어있으면 혹시 죽음으로 다가갈까 두려워한다.
파니도 자신의 그런 점이 두려웠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인간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파니는 자신을 완전히 숨겨줄 죽음을 택한다.

소설에서의 '화자'는 소설가 자신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화자'를 제삼자의 눈으로 파니를 볼 수 있게 하는 나름의 객관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 똑바로 볼 수 있으니까. 그래야 파니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테니까.

마흔 셋의 나이까지, 아마 파니는 엄청난 운명과 싸웠을 것이다. 전사처럼.
아니면 연극무대 위에 배우처럼 연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살리고 싶어서.
왜 '호피무늬'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한참을 생각해본다.
맹수가 들끓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호피처럼 적절한 무늬가 어디있겠는가.
어쩐히 화려해보이고 연약해보이는 금발을 숨기기 위해 위장하기 가장 좋은 호피무늬모자.
죽은 동생을 이렇게까지 표현해낼 정도의 세심한 관찰은 사랑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럼에도 파니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것은 '화자'의 책임이 아니다.
사랑하는 동생 파니를 위해 감동과 슬픔과 그리움이 담긴 제문(第文)같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