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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주택
- 야마모토 리켄.나카 도시하루
- 20,700원 (10%↓
1,150) - 2025-03-06
: 3,485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야마모토 리켄 하면 우리에게 ‘유리창으로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거실’을 만든 건축가로 익숙할 것이다. 바로 강남 세곡동 보금자리 주택 이야기다. 듣기로는 이웃과의 소통을 위해 그렇게 디자인했다고 한다. 과연, 거실이 투명하면 이웃과 소통하게 되나? 옆 사람이 내 컴퓨터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아도 불쾌한 시대에 말이다. 그것이 나에게 즉각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탈 주택>은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어찌보면 건축가의 친절한 설명서라고 할 수 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자. 이 건축가의 공간은 침실(가장 사적인 영역)-거실(사적인 영역 안에 있는 공적인 영역)-커먼데크(공적인 영역)으로 나눠져 있다. 침실이 사적인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건축가도, 우리도 이견이 없다. 문제는 거실이다. 거실은 곧 응접실이고,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를 이어주는 공간이다. 건축가는 이 공간을 외부에 개방된 커뮤니티 형성을 위한 공간으로 여겼다.
그에게 기존의 아파트 공간은 ‘밀실주택’으로 여겨진다. 밀실주택은 곧 노동자 주택이다. 즉, 임금노동자를 위한 노동력 재생산(성행위)를 위한 주택으로,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성 없는 시급노동자를 위한 장소다. 즉, 균일한 제품의 생산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집이다. 이러한 ‘1가구 1주택’은 1947년 니시야마 우조가 주장한 식침분리(먹는 공간과 자는 공간의 분리), 취침분리(자녀 방과 부부 방의 분리)에 근거하여 디자인되었으며, 현대까지 큰 변화 없이 계속해서 생산되어왔다.
문제는 이러한 ‘밀실주택’에서는 지역사회가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역사회권이라는 것은 마치야(우리나라로 따지면 상가주택 거리)에서 발생하는데, 마치야는 거리를 향한 가게와 가게 뒷편에 있는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나라 옛 구멍가게들이 그러하듯이. 이곳 가게가 바로 ’시키이‘가 되는 것이다. 주민들은 거리의 번영을 위해 함께 자주적으로 마을을 운영하며 가업을 이어 장사를 해나간다. ”주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경제활동에도 참여한다는 구조를 갖추지 않는 한 커뮤니티는 성립될 수 없다.“ 즉, 경제적으로 함께 엮이지 않는 한 커뮤니티를 구성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 다시 강남 세곡동 보금자리 주택으로 돌아가보자. 건축가는 이 주택을 단순히 임금노동자의 주택으로 보지 않고, 거실이 공방이나 가게나 기타 여러가지 다채로운 (경제)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거실은 공공공간에 면하여 활짝 열릴 수 있도록 디자인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밀실주택‘을 원한 보통의 사람들이었기에, 거실 또한 사적인 영역이 되기를 원했고 그렇게 유리문마다 블라인드로 가리게 된 것이다.
서울에 살았을 때에는 나 또한 당연히 거실을 가리는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무리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기꺼운 사람이라 하여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아파트 단지에 여자만 사는 공간을 보란듯이 열어두는 것은 자해에 가까운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남해군의 시골마을로 온 이후의 나는 어떤가.
남해는 관광업이 가장 큰 수입원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남해군민 모두가 야마모토 리켄이 말하는 ’지역사회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남해에 오는 사람이 많아져야 우리가 모두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될테니까. 그러나 남해는 꽤나 넓은 섬이라(제주-거제-진도-남해 순으로 크다) 차로 10~15분 거리에 있는 마을끼리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남해의 청년 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까운 동네에 사는 친구들끼리 공식/비공식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튼 이곳에서의 주택은 당연히 도시에서의 주택과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을 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안다. 대문을 닫고 사는 사람도 거의 없다. 어느 집이든 거실이 길가에서 조금이라도 들여다보이게끔 되어 있다. 저녁 즈음 마을을 산책하면 불빛으로 어느 댁에 누가 귀가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다. 자연스럽게 모든 집의 거실이 ‘시키이’가 되는 셈이다.
나 또한 주거 공간은 원룸 형태로 되어 있어 온전히 사적인 영역이지만, 사무실로 쓰는 공간은 팜프라촌의 라운지다. 팜프라촌 투숙객들이 오기도 하고, 이웃 주민들이 오기도 하고, 지나가던 친구들이 들르기도 한다. 요새는 일 주일에 한두 번씩 옆 마을 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는 닉이 빵을 사들고 찾아와 영어와 한국어로 수다를 떨다가 간다. 때로는 라운지 앞에서 밭일하는 이장님과 주민 분들께 커피 한 잔 내어드리는 공간이 된다. 두모마을 청년들의 ‘시키이’다.
야마모토 리켄이 생각한 이상적인 커뮤니티 주거는 이미 남해에 만들어져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과거의 농경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커뮤니티를 현대인들을 위해 재현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탈 주택>의 부제는 ‘공동체를 설계하는 건축’이다. 사실 이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문제일 것이다. 공동체가 이루어진 곳에서는 자연스레 건축도 공동체를 향하도록 만들어진다. 훌륭한 건축가가 없더라도 이미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공동체가 없는 곳에 공동체를 위한 건축을 만든다면 그것은 잘 작동할 것인가? 경제활동을 함께하지 않는 임금노동자들 사이에 커뮤니티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야할까? 책을 반절 정도 읽은 지금에는 아직 이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책장을 다 덮은 후에는 어렴풋하게라도 알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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