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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님의 서재
  • 우리는 왜 극장에 가는가
  • 이상우
  • 16,000원 (480)
  • 2020-08-14
  • : 62

서울에 올라온 후의 지난 3년은 극장에서 보냈다. 순간의 예술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것은 일종의 배신감이었다. 이렇게 재밌는 걸 여태 나만 몰랐다고? 다년간의 덕질 경험을 통해 지금 당장 온몸을 던지지 않으면 평생 볼 수 없을 섬광이 나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고, 3년간의 대학 생활은 관극 일정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보낸 시간에 후회라고는 조금도 없다. 비록 티켓과 후기밖에 남는 것이 없는 취미라고는 하지만 나의 지난 계절들에 붙은 사랑하는 극의 이름들과 그 시간을 통과하던 ‘나’의 기억은 과거의 직감 이상으로 귀중한 것이 되었으므로.


내가 뮤지컬 (책에서의 어휘는 ‘뮤지컬 연극’)보다 연극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만 2년차 관객이 되어갈 즈음이었다. 넘버의 도움 없이 대사와 연출만으로 승부하는 연극이 좋았다. 말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좋았다. 무엇보다도 얽히고설킨 그 말들이 결국 극장 밖으로 뻗어 나가고자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좋았다. 혹자는 뮤지컬은 환상을, 연극은 현실을 기대하며 보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일반화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날 보고 온 연극은 세 인물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나열한 독백극이었다. 무대는 단출하고 연출이 극적으로 세련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에게 하고자 하는 말만큼은 그 연말에 본 어떤 극보다도 확실했다. 그 목소리들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깊게 박혀 며칠 내내 맴돌며 연극의 힘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하게 했었다.


필자는 연극이 억압(혹은 질서)의 역사인 인류사에서 금기를 저지르고자 하는 욕망의 배출구이자 금기를 저질렀을 때의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교육 도구의 역할을 해 왔다고 말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자면 연극의 본질은 금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 말은 때때로 은유가 아닌 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했다. 100년 전 시리아에서는 연극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1960-1980년대 독재정권 통치 당시의 한국 연극계에서는 많은 희곡들이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었다. 왜 억압자들은 예술을, 연극을 적극적으로 금지할까?


그 자체로 금기인 연극은 상황이 억압적일수록, 시대가 불합리할수록 더더욱 격렬한 저항의 몸부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를 행하는 것 자체가 때로는 사회적 합의와 시대에 정합하는 자들을 향한 비판의 행위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연극의 속성을 다루는 극이 여럿 있지만, 그중 내가 극장에 가는 이유에 가장 근접한 연극 <알앤제이>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조 칼라코가 각색한 이 연극은 1910년대 영국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의 여러 욕망을 가감없이 그려낸 탓에 금서로 지정되어 있던 <로미오와 줄리엣> 원전을 발견한 네 남학생은 기숙사 문이 닫힌 깊은 밤, 버려진 장소에 몰래 숨어들어 낭독회를 한다. 흥미 혹은 반항심으로 시작되었을 일탈은 네 사람이 점점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가면서 단순한 놀이가 아니게 된다. 그들은 인간의 강렬한 감정과 피 흘리는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지를 ‘죽음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직접 펼쳐 보며 목도한다. 이 경도와 열렬한 감동은, 비록 줄리엣과 로미오의 불꽃은 —베로나는 변화시켰을지언정— 결국 비극으로 끝났지만, 모든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긴 아이들에 의해 학교 밖으로, 세상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또한 무대 위의 환상을 함께 목격하고 같은 감동을 느낀 관객들에 의해 21세기의 극장 밖으로까지 번져 나갈 것이다.


결국 이는 연극에 대한 연극이다.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이름도 목소리도 없는 —학생들은 이름 없이 학생 1, 2, 3, 4로 넘버링되며 극본상의 모든 대사는 오직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의 인용으로만 이뤄져 있다. — 학생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관객들은 인간은 왜 연극을 하는가, 심지어 금지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을 모아놓고 책을 읽으면서라도 행위를 이어가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마지막 장면에서 학생 1에 의해 던져진 새빨간 천이 하늘이며 추락하는 순간 막연히 느낀다. 연극,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찬가가 아닐 수 없다.


무대 위에 올려진 삶이, 이야기가 그 자체로 사회를 향한 목소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연극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제의성 때문이다. 연극은 제의다. 굳이 연극의 기원이 인류 초창기의 제사 의식임을 말하지 않더라도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극예술이 여전히 무엇인가를 향한, 무엇인가를 위한 신성성을 띠고 있음을 알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영혼이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외치기 위해 타인의 삶 또는 누군가의 고통을 제물 삼아 벌이는 희생 제의라고.


순간의 예술에 경도당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게 그만큼 값진 것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여전히 극장에 가는 이유가 뭐냐고 다시 묻는다면 이러저러한 말들로 풀어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하거나 의무감으로 보지만 않으면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영감을 주는 아주 좋은 취미라고 생각한다. 특히 창작자로서는 이보다 매혹적인 자극이 없다. 연극은 사회 정화를 목적으로 하고, 그 목소리들은 대부분 값지고, 타인의 삶을 엿볼 기회는 흔치 않고, 등, 등. 하지만 그 모든 효용을 다 떠나서 그저 아름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과 몸짓과 말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이름 없는 학생과 당시의 내가 그랬듯— 이상, 목표, 이유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그 신성 혹은 불경을 목도하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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