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했었다.
어두운 생각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삶, 흔히 말하는 내세에 대해 강조하는 편이다.
죽음이 어떤 의미이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그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일종의 결과지(?)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철학의 영역에서는 '죽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다루고 고민하는 것으로 안다.
물론 철학이라는 영역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할 '정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라는 서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히 있다는 것이 꽤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기독교에서 더 진지한 논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분명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일진대,
그리고 성경이 주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이유가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벗어날 수 없는데,
기독교는 '죽음' 자체보다는 '구원과 영생'이라는 키워드에만 더 집중하는 것 같다.
물론, 중요하다.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혹은 너무 가볍게 여기고 이후의 삶만 논의 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적으로 '구원과 영생'에 대한 심각한 받아들임을 제거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할 때에, '구원과 영생'에 대한 갈망이 진지해지고,
'복음'이 진짜 우리에게 참다운 좋은 소식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찾아보아도 '죽음' 자체에 키워드를 맞춘 신앙서적은 그리 많지 않다.
간혹 죽음의 이유를 말하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중요함을 피력하는 부분들은 있으나
크리스천으로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를 심도 있게 다루는 책은 거의 없는 듯 하다.
그러다가 최근에 눈길을 끄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두란노에서 출판된 토드 빌링스의 <죽음이 삶에게>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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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책 표지의 왼쪽 윗면의 문구가 이 책을 펼치게 하였다.
'끝을 기억하는 삶, 진정한 오늘을 살다!'
끝을 기억하는 삶, 진정한 오늘을 살다
그저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죽음에 관한 이론적인 논쟁이나 신학적 정리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한다고 하면, '죽음'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데
단지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다고만 말하고, 죽음 이후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삶의 여정 한 가운데서 '죽음'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은 어떠해야 하는 것이었다.
먼 미래의 어느 시점을, 별 영향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은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 지를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기에 이 책의 짧은 문구는 충분한 매력이 있었던 표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처음 듣는 듯한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을 때,
그저 죽음을 문자적으로만 이야기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상황의 설명을 통해 알았고,
이 책의 무게감이 여기에서부터 비롯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기암 진단을 받았다.
치료를 받고 암 공동체에 속한 다른 이들을 알아 가는 여정에서 나는 인간이 필멸의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복음을 증언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수단임을 깨달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어 가는 피조물'이라는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을 주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p.18)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자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는 없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탁월함이라는 것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신학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잘 정리를 하는 분들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러나 상황적으로나 독자들과의 거리의 근접성을 고려해봤을 때,
저자의 상황은 가장 죽음을 솔직하면서도, 이미지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의 현실적인 죽음에 대한 태도들을 꼬집는다.
분명 우리는 건강을 이야기하고, 건강하게 살려는 노력들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한다.
의학에 기대든지, 운동에 기대든지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삶의 목적 방향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저자는 그 건강이라는 것의 목적이 과연 올바른 성경적 방향성인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죽음과 역행한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서, 저자는 잠시 멈춰 서서 체크할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정말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가 말해왔던, 성경을 통해 말한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죽음'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 위한 영적전쟁처럼 살아왔던 것이 모든 크리스천의 방향성일텐데,
저자는 그 목적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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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학을 모두가 죽어 간다는 일상의 현실에서 우리 눈을 가려 줄 은폐물로 여기고 매달린다.
최고의 의학적 치료도 죽음이라는 진단 앞에서는 어떤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학적 돌봄을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받지 않고, 우리의 독재적 주인이 될 수 있는 금송아지로,
스스로 만들어 낸 신으로 바라본다.(p.171)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니,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죽음은 문제가 있는 상태이고, 하나님은 문제가 있는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려 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따를 때에 죽음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물론, 당연한 부분이 있다. 맞는 부분이 있다. 결코 그 신앙적 방향이 틀리진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뒤통수를 맞는다고 느꼈던 것은,
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죽음을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상상도 못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건강이라는 것이, 그 단어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육적인 건강을 원하시지만,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못함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질병에서부터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우리 삶의 0순위 기도제목이며,
우리 삶의 문제가 있는 영역들이 본래대로 회복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 바램과 우리의 상태가 너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에서 그것을 저자는 어찌보면 냉정하리만큼 꼬집으면서 분명하게 자리잡으려고 했다.
죽음과 상관없는 삶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죽음이 삶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직시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죽음이 삶에게 주는 그 메시지에 귀를 닫고 있었음을 저자는 이야기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적 제자도라는 길에서는 죽을 존재인 우리의 한계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및 이웃의 한계를 주기적으로 정직하게 떠올려야 한다.
기독교 제자도라는 길에서는 죽을 운명이라는 상처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생명을 주는 길, 자유와 사랑의 길이다.(p.20~21)
죽어가는 과정은 성장의 기회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배울 기회다.
우리 삶의 죽음의 구간을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피조물이 이르러야 할
성숙해지는 한 단계다.(p.92)
어두운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병상에 앉아 있는 중병 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분명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기 보다는 삶의 여정임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하게 직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동시에 신앙의 여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은 준비해야 하고, 과정 가운데서 성장해야 하는 것이기에
죽음 역시 그런 시선으로 대하고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은 이 시기에 귀한 서적이 출간 된 것 같다.
분명히 생각해봐야 하지만,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보게 하는 책이 나왔다.
시대를 역행하는 책이 아니라, 시대에 진작 등장했어야 하는 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시선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똑바로 두라는 것이다.
정말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의 초점이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리하며 이렇게 정리한다.
최후의 기독교적 소망,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생명 연장이나 자아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시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계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분의 백성은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내세에서 온전함을 완성하게 될 이들이다.
우리 자신만 놓고 보면 내세에 들어갈 권리도, 자격도 없다. 우리는 내세를 누릴 만한 자들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선물이다.(p.322)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선물을 받는 자들의 역할이라면 역할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도 사용하신다. 죽음도 선한 것으로 사용하신다. 그 섭리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부디 이 책의 이 시대의 귀한 영적 거울이 되기를 소망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신앙적 거름이 되기를 소망한다.
죽음을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진짜 복음을 볼 수 있기를, 진짜 복음의 여정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