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누군가는 사랑, 또다른 누군가는 재물, 누군가는 인권이나 법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람마다 우선으로 두는 가치는 다르겠지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나면 적어도 그 가지중 하나는 '선(善)'이라 답할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미는 도움의 손길, 부당함에 맞서는 의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는 용기같은 것들로 발현되는 선의 의지 말이다. 물론 사람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이 많다. 게다가 삶의 모습 또한 복잡하기 이루말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삶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복잡한 도로 위에서 위태한 걸음을 걷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소설의 주인공인 '펄롱'의 삶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펄롱은 딸들이 수녀원 인근의 손꼽히는 세인트 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만 있다면 만족할 남자였다. 부자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살림을 꾸리며 석탄 배달부로 일하는 펄롱은 가능한 자신의 것을 나누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선의가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펄롱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5명의 딸을 함께 길러내는 아내는 펄롱과 의견이 달랐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그의 어머니를 거둬준 미시즈 윌슨의 도움을 받은 펄롱과 달리 아내는 '힘들게 사는 사람 중에는 스스로의 무덤을 판 사람이 있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아내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당시의 아일랜드에 막달레나 세탁소가 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1985년의 아일랜드에는 정부와 종교의 묵인아래 타락한 여자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여자들을 착취하고 감금하며 노동하게 하고, 죽는순간까지 세탁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강제 수용소인 세탁소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혼모, 강간 피해자, 어린 아이 등 아무 죄없는 여자들이 수용소에 갇혀 보호라는 이름의 학대를 당한다. 석탄 배달을 하다 그 실체를 맞닥뜨린 펄롱은 자신을 비롯해 아내와 딸 5명으로 이뤄진 가족의 미래를 두고 거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실제 있었던 역사를 가져온 소설의 줄거리는 꽤 단순한 편이다. 일생일대의 선택이 남의 이야기가 되면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볼 수 있는 것처럼, 펄롱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진실을 알게 되고 이대로 외면하거나 혹은 외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선택 중 하나를 해야하는 펄롱의 상황은 위태로워보이는 한편 결말이 정해져있단 느낌을 받게 했다. 소설에서 이러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대개 주인공은 올바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담담하며 함축적인 이야기는 독자를 펄롱의 내면으로 서서히 끌어당긴다. 때문에 설렁설렁 읽으면 그걸로 끝일 소설이지만 찬찬히 보면 이것만큼 어려운 글이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땐, 분량이 많지 않다고 만만하게 봤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갈수록 대혼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종일관 숨막히듯 조여오는 상황이 답답했고 사회적 제도 아래 착취당하는 여성과 살기 위해 문제를 외면하는 여성이 교차될 땐 안타까웠으며 마침내 펄롱이 수녀원으로 향했을 땐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나는 소설을 읽기 전엔 막달레나 세탁소에 관해 몰랐다. 수녀원에 석탄배달을 하러 간 펄롱이 엉망인 모습의 여자아이를 보게되며 갈등이 시작되는 순간까지도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강까지만 데려다달라, 대문 밖으로만 나가게 해달라, 아저씨 집으로 데려가달라 이어지는 애원을 보며 나도 펄롱처럼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그냥 물에 빠져죽고만 싶다는 아이의 말이 가슴에 박혀들었다. 끝내 수녀원에 갇힌 아이를 외면하고 나와 엉뚱한 방향으로 도망치듯 길에 접어든 펄롱과 함께 나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 도로 위에서 만난 노인에게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라는 대답을 듣는순간까지도 말이다.
삶은 멀리서보면 희극 가까이서보면 비극이라했던가. 막달레나 세탁소를 알게 된 이후에도 펄롱이 보는 거리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나는 이 부분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막달레나 세탁소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고. 물론 펄롱 또한 마찬가지다. 세탁소의 비밀이 알려지기 전 그가 다섯 딸의 아버지라 딸을 걱정하는 모습, 문득문득 나타나는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과 까마귀로 대변되던 불길함이 스쳐지나갔다. 펄롱의 내면은 내내 그토록 치열했다. 사람이 부당함에 맞설 용기를 내기까지의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이상한 것을 보고 싶지 않아하고 외면하고 싶어하며 내가 나서기 전에 부당함이 해결되길 원한다.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기원이고, 어떻게 보면 비겁한 외면일 뿐이라 여길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내면의 갈등이야말로 사람의 솔직함이라 생각한다. 누구라도 눈앞에서 부당함이 벌어지길 바라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는 내면의갈등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거슬리는 것을 보면 자꾸 생각이 난다. 이러한 이치는 펄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예배당으로 걸어가는데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특히 14주된 아기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달라는 세탁소 아이의 청을 외면하고 놔두고 나와 미사를 보러갔다는 데 죄책감을 느낀다. 여기서 하필이면 가장 더러움을 타는 석탄 작업을 하던 펄롱이 석탄광에서 소녀를 발견한 것 또한 의미심장해진다. 은은한 배척을 받았던 펄롱이 자신보다 더 아래에 있는 세탁소의 여자들을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변화는 이토록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 같기도 해서다. 펄롱이 선을 행하기로 결심한 것 또한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오랜세월 궁금해했던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챈 것이 계기였다. 펄롱은 자신이 자라는 동안 곁을 지켜주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혔던 고민의 해답을 찾는다. 오래전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수녀원의 아이에게도 똑같은 것을 나눠주자고. 그렇게 수녀원에서 세라의 손을 붙잡고 나온 펄롱은 쏟아지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꿋꿋하게 광장을 걸어간다. 개인적으로 그 장면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비로소 세탁소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세라가 펄롱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본 광장의 조각상을 보던 모습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가져다놓은 조각상은 성모의 모습도 어린 예수의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세라의 눈길을 잡아끈것은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대상이 아니라 갈색 당나귀 조각상 하나였다. 수녀원에서 볼 수 있었던 예수와 성모는 소녀에게 구원이 아니었고, 오히려 착취의 대상이자 위선의 증거였다. 수녀원을 방문하는 그 누구도 잡아주지 않았던 손을 잡고 나서던 순간 세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마음으로 자신의 아기를 생각나게 하는 당나귀를 눈에 담았을까. 담담히 풀어내는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다보면 작가가 얼마나 세심하게 장치들을 배치해뒀는지 알게된다.
이쯤에서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펄롱의 질문에 답을 찾아보자면 의미를 찾기 전에 이미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몸과 정신이 미성숙한 어린아이일 때부터 도움을 받고 자라나 나도 모르는 사이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 곁에 있는 사람이나 만들어지는 물건까지도 홀로 생기지 않았다. 그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살곤한다. 살아가다보면 지쳐서 혹은 제 멋대로 살며 항상 홀로 살것처럼 당당히 버티다가도 사소한 계기에 무너지기도 누군가가 내민손을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정한 손을 내미는 것은 왜 이리 어렵기만 한 것인지. 펄롱 외의 사람들의 선택이 마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 여겨지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너머로도 내밀어진 손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으니까.
책을 다 읽은 뒤엔 왜 이런 제목을 붙였나 생각해보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곤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역설적인 화법이 아니었을까. 펄롱의 모습을 보며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기보다 작고 사소한 것부터 시도해보란 뜻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사소하고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세상엔 사소하기만 한 일이 없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펄롱의 어머니에게 손내밀어준 미시즈 윌슨의 작은 선의가 펄롱을 살렸고, 그리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펄롱은 세월이 지난 뒤 세탁소의 학대받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아이를 구했다. 이렇듯 나는 사소함이 일으킨 선의 순환고리를 믿는다. 선의는 반드시 선의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은 세상의 다정함을 볼 때마다 조금씩 자라난다. 비록 누군가에겐 사소함으로 끝날 뿐일지라도 누군가에겐 일생의 구원이 될 수도 있다. 펄롱이 구한 소녀 또한 어쩌면 펄롱의 어머니일수도 있었던 소녀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작가의 생각을 소설을 통해 모두 읽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해 치열히 고민하고 행동한 흔적을 소설을 통해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삶의 길 위에서 위태로워질 때면 선의를 향한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사람다움'을 마음에 되새겨야겠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이뤄진 삶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