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을 세 가지 단어로 요약한다면 어떤 단어를 고르시겠습니까? 보통 이런 질문을 받으면 천천히 인생을 돌아보고 단어를 고르는 데 고심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이는 소설 속 사람들의 부고를 쓰는 요양사가 자신의 일을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양사는 '묵 할머니'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다. 고작 3개의 단어로는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없다며 코웃음 치는 묵 할머니는 3개는 적고 9개는 너무 많으니 8개의 단어가 마음에 든다는 말과 함께 요양사에게 떠올린 단어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기 시작한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 7개의 단어를 말한 묵 할머니는 요양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목차에서부터 여덟의 인생으로 분류해 두었듯 묵 할머니는 여러 인생을 살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졌던 이름으로 살았던 평양 소녀의 인생,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에 의해 새로운 이름을 받은 소녀 시절의 인생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인생을 위한 가명을 쓰기도 한다. 이름에 따라 몇 개의 삶이 나뉘는 탓에 좌절할만도 하건만 '묵 할머니'는 오히려 그러한 분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삶도 변화시키며 살아내는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하면서도 악착같은 삶의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목적은 항상 '삶'에 있었다. 그저 살기에 급급한 시대였기에 그 목적은 충분히 소녀를 살게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살아남기 위해 치워내고, 살아남기 위해 위안소를 탈출했으며 또한 먹고 살기 위해 미군부대에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녀의 이야기에서 가장 크게 느껴진 것은 용기였다. 강한 의지로 삶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여성의 모습은 전쟁을 일으키고 파괴하는 자들 사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폭력을 휘두르며 강자임을 과시하기보다 약자의 방식을 택해 강하게 살아남는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상깊었다.
흙을 먹는 기묘한 '토식증'을 가지고 있는 소녀의 행적은 어머니가 되어서도 늙은 '묵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어진다. 왜 하필 흙을 먹게 되었을까. 순수한 충동으로 시작해 특이하다고 잘못된 것이 아니란 현명한 엄마의 말을 듣고 자란 소녀는 갈수록 영민해진다. 그러니 독자인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흙'이라는 개체는 어쩌면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갈망임과 동시에 어떤 의식이 아니었을까라고. 충동이라고 하기에는 흙을 먹는 그녀의 모습에서 강렬한 감정이 느껴졌다. 소설을 보는 동안 화가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던 장면들은 모두 땅 위, 즉 흙 위에서 일어난다. 지금의 포장된 도로들을 보면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광경이지만 과거의 길은 흙내음이 풍기고 흙 본연의 붉은색 혹은 밤색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삶이 목적이었던 그녀에겐 흙이란 잃어버린 터전임과 동시에 어떻게든 발 붙이고 살아가야할 지반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따스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표지의 색들은 '묵 할머니'의 삶들과 닮았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발맞춰 숨가쁘게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끔 한다. 역사적 사실을 그저 역사로만 치부하고 과거에서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면 계속해서 '묵 할머니'와 같은 이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던 그녀는 스스로 길을 개척한 끝에 자식을 위해 마지막을 준비한다. 요양원의 별난 치매 노인 '묵 할머니'는 요양원을 탈출해 어느날의 과거로 향했다. 차가운 콘크리트 천장이 하늘을 막지 않는 곳, 포슬포슬한 흙이 있는 곳, 삶을 이어가기 위해 처음으로 활용한 수단이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묵 할머니에게선 마지막 단어를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가 집어삼킨 마지막 단어가 여자일수도 희생자일수도 사기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없다는 건 누구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묵 할머니'의 삶은 나의 삶이 되었을 수도,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 부분 때문인지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더욱 묵직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