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상에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합니다'. 기성세대의 사죄말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은 수록된 세 편의 연작 소설들을 통해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그 중 첫 번째 이야기 '꿰맨 눈의 마을'은 주인공인 이교가 자신이 살고 있는 타운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이교는 고립된 타운에서 살고 있는 소년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 모여 견고한 벽 안에서 살아가는 타운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런 세계를 위협하는 건 말 그대로 괴물이다.
이교가 태어나기 육십여 년 전, 극지방의 빙하가 80퍼센트까지 녹으며 인류는 대재앙을 맞이했다. 빙하 깊숙한 곳에 얼어 있던 고대의 바이러스들은 사람들의 모습을 변형시켰다. 두 개였던 눈이 몸 곳곳에 수십개씩 더 돋아나기도 하고 귀가 더 생기기도, 입이 더 생기기도 했으며 손과 발, 팔과 다리, 머리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류는 둠스데이를 맞아 멸망했다. 그런 와중에 이교가 살고 있는 타운은 '저주병'에 걸린 괴물들을 피해 만든 벙커이자 '인간다움'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었다.
이교가 다니는 학교에서 조례 때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지난 밤 누군가 괴물이 살고 있다는 밖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마을 밖의 괴물이란 '저주병'에 걸려 더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감염자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타운의 안에서 저주병의 징후가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가족, 연인, 친구도 예외없이 장로에게 알려 추방시켰다. 추방되는 감염자에게 주어지는 건 두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미트파이 한 판과 콜라 한 캔 뿐이다. 그리고 미트파이엔 최대한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독이 들어있다. 미트파이는 추방자에게 자신의 최후를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마지막 배려이자 타운이 생겨난 이래 가장 유서 깊은 전통이었다.
언젠가 손가락 하나 둘 정도나 손 하나 정도는 더 있으면 좋을지도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혼자서 붙잡고 하기 힘들었던 일을 하며 간절히 했던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런 상상에서 시작됐을지 모를 소설 '꿰맨 눈의 마을'에선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이 나온다.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머리에 두 눈을 가지고 팔 둘과 다리 둘이 있는 보통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 외에 낯설기 짝이 없는 모습이 등장한다. 수십 개의 눈이 달려있기도, 손이 더 있거나 입이 하나 더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사람의 언어를 말하고,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습만으로 괴물 취급을 받아야 할까?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사람이라는 범주 안에 넣어야 할 것들은 모두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닌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인간에게 인간다움이란 그저 '보여지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간다움이 사라진 추방자를 더이상 인간취급 하지 않는 곳에서 이교는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타운에 있었던 두 명의 친구 중 하나는 독이 든 미트파이와 함께 추방당했고 나머지 하나는 추방당한 친구를 고발했다. 이교는 문지기인 삼촌을 통해 추방당한 친구 '램'의 마지막을 전해듣는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끝까지 울부짖다 끝내 버려졌노라고. 타운 내에선 종종 이런 일들이 있었다. 저주병이 발병하는 건 특별한 규칙이 없어서 그 대상이 누가 될지 몰랐다. 추방자가 발생한 이후에 남은 사람들은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하거나 잊어버린 척, 혹은 원래 없었다는 듯 존재를 지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감염병이라는 보이지 않는 위협 때문에 매일매일 불안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타운 사람들도 각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두 친구 때문이 아니다. 이교에겐 태어날 때부터 등 한복판에 세 번째 눈이 존재했다. 저주병에 걸리면 이성을 잃고 피와 고기를 탐한다는 말과 달리 이교는 멀쩡히 인간다움을 지키며 살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품은 이교는 타운 밖으로 쫓겨난 친구 램을 생각하고, 언젠가 삼촌이 봤다는 비행기를 상상하며 타운 밖의 세상에 또다른 타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그런 이교의 앞에 어느날 정말로 비행기가 나타난다. 추락한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탈출한 건 손등에 큼직한 두 눈이 박히고 이마에 세로로 박힌 눈이 있는 감염자 '람'이었다. 람은 이교에게 구인류와 신인류에 관해 가르쳐준다. 타운 밖의 세계는 괴물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고, 진화를 받아들인 신인류가 사는 곳일 뿐이라고. 그러니 이교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준 것 또한 세 번째 눈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건 구인류와 신인류로 구분짓는 상황이었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면 새롭고 낯선 것들도 그저 비슷한 공동체로 받아들이는구나 싶기도 하면서도 배척받았던 초기의 신인류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처음 세계가 멸망하듯 절망했던 사람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시작하자 배척 대신 적응을 선택한다. 변형된 신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변형된 신체에 맞는 옷이 나왔으며, 변형된 신체를 당당히 드러내며 이상현상을 '감염'이 아닌 '진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럼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변이되지 않은 구인류들은 외진 곳으로 떠나 자신들만의 마을을 만들었다. 바로 이런 마을이 이교의 마을과 같은 곳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타운 밖의 상황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을까?
소설에선 여기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타운 밖의 희미한 흔적 등으로 밖의 상황을 추측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등장하지만 직접적인 이야기를 해주진 않는다. 다만 두 번째 이야기인 '히노의 파이', 세 번째 이야기인 '램'을 통해 앞으로의 상황은 추측해볼 수 있다. 결국 마을 밖을 선택한 이교의 미래가 닿는 곳은 새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일거라고 나는 믿는다. 이교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세 번째 눈을 가진 이교는 평생을 거짓으로 눈을 가리며 살아왔다. 친한 친구들과 수영하나도 하지 못하는 채 드러난 신체 변형으로 먼저 쫓겨난 친구를 그리워했던 이교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곳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딛는 수밖에 없었다.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몇 개의 눈을 더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세 편의 연작 소설은 같은 세계관에 관점만 조금씩 다르기에 다양한 추측과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라면 독이 든 미트파이를 선택으로 볼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부터 체제를 위해 괴물을 이용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을 넘어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괴물이란 누구를 뜻하는가?라는 물음까지. 이것은 다만 소설일 뿐이지만 책 속에 수록된 작가의 에세이 '빛나는 모형들'을 통해 또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어떤 가짜는 진짜인척 하며 진짜보다 영원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은 끝내 소설을 모두 가짜라 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세상에 관한 호기심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특히 빛난다. 어떤 이야기 또한 빛나는 시간이 있다. 나는 그 시간을 더이상 이야기를 이야기만으로 볼 수 없게 될 때라고 생각한다. 견고히 쌓아올린 성 밖으로 시선을 돌릴 계기를 만난 이교처럼, 소설을 읽는 동안 조금 더 시선을 돌려보라는 소설 속 메시지가 겹쳐지는 듯 했다. 그 애틋하면서 다정한 이야기들이 타운 안의 생각에만 갇혀있지 말고 한 발자국 밖으로 나와보라 말을 건네는 소설 같아 내내 마음이 쓰였다. 이교가 숨기고 있었던 신체변형이 하필이면 '꿰맨 눈'이었다는 것 또한 더없이 상징적이기에 언젠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다름을 이야기하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는 소설이 될 것 같단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