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원이라고 아시는지. 지금도 시도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단행본 출간을 자랑하던 곳이다. 출판사 이름을 모르더라도 내 또래 형제자매님들이라면 <영웅문>이나 <우담바라>, <라마와의 랑데뷰>, <먼나라 이웃나라>,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의 걱정을 하는구나”라는 TV 광고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고려원에서 나온 책은 우리 집에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중 <유니스의 비밀>이라는 추리소설도 있었다. 어떻게 이 책을 입수했는지 경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져 있다. 하나는 정가가 3,000원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주구장천 읽었던 수많은 추리소설 중에서도 단연 ‘넘버 원’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북스피어 출판사를 차리고 가장 먼저 들여다 본 목록 가운데 하나가 ‘망한 고려원에서 출간한 추리소설’들이었다. 당연히 <유니스의 비밀>은 출간 1순위였다. 나는 이 작품을 계약하고 소설가 장정일 씨에게 어렵게 부탁하여 발문까지 받아서 출간했다. 제목은 오랜 고민 끝에 <활자잔혹극>으로 바꾸었다.
<활자잔혹극>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안 팔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안 팔렸다. 왜지.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북스피어가 듣보잡이라서? 고려원에서 한 번 나왔기 때문에? 대체 왜 이 책을 몰라주는지. 5년 뒤에는 원작자와의 계약만료로 절판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창고에 쌓인 책들을 폐기처분할 때는 정말 눈물 나더라.
한데 2022년 5월 19일자 <조선일보>에서 ‘물리학자가 추천한 혐오를 이기는 책’으로 김상욱 교수가 <활자잔혹극>을 소개하며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한 거다. 이럴 수가(털썩). 전화가 올 때마다 정수리 쪽 머리카락이 쑥쑥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팔자구나!’ 생각하며 “계약이 종료된 책이라 출판사에도 책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활자잔혹극>은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를 처음부터 대차게 밝혀버렸다. 살인의 동기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범인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기 때문에, 즉 자신이 문맹임을 감추기 위해 한 가족을 무참히 살해했다. 문맹이란 그토록 부끄러운 일인가? 사람을 죽일 만큼?
이 대목을 김상욱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문맹이 거의 없어서 이 상황을 생각하기 어려우실 수 있는데, 이렇게 가정해 볼까요.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파티에 갔어요.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당신은 궤변 같은 첫 문장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는 지혜도 얻게 될 겁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복간할 결심을 하진 못했다. 이미 한 번 복간했다가 홀랑 망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절판으로 걸려 있던 <활자잔혹극>의 ‘응원 댓글’ 란에 누군가 올린 이런 글을 올해 초에 읽게 되었다. “김상욱 교수님이 추천해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소장하고 싶습니다! 중고가 3만원에 돌아다녀요ㅠㅠ”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이 말이 내 안에 남아 있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저자와 다시 계약한 뒤에 번역을 다듬고 디자인도 새롭게 했다. 물론 “이 사달이 난 것은 전부 김상욱 선생님 때문이니까 책임지셔야 한다”고 협박(?)하여 엄청나게 바쁜 김상욱 교수의 추천사도 받아냈다.
아아 그리하여 10년 만에 다시 펴냅니다. 영국의 거장 루스 렌들의 걸작 장편,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추리소설 <활자잔혹극>, 북스피어의 ‘복간할 결심’ 시리즈 제1권입니다. 이번에도 안 팔리면, 이후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저도 모르겠으니까 알아서들 하십쇼.
두 번이나 복간했으면 한 권 정도는 사주는 것이 강호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마포 김 사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