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였나.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는 선생님의 질문에 ‘소설가’라고 대답했다. 그냥, 멋있어 보여서 그랬다. 국문학과에 적을 두면 소설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입학해 보니 훈민정음, 향가 같은 것만 가르치더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도 싫지 않았지만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는 배우지 못했다.
네 학기를 마칠 때쯤 ‘소설 습작’ 강의가 개설되었다. 이거다 싶어 신청하고 구상에 들어갔다. 장르는 미스터리. 나는 밤마다 책상에 앉아 갉작갉작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하지만 그게 죄다 ‘뻘짓’임을 깨닫는 데는 탈고하고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주위의 몇몇 친구들은 단지 도입부를 읽는 것만으로도 범인을 알아맞혀 버렸으니까.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근성이 없다고 하겠지만 애초에 독서량도 턱없이 부족했어. ‘언젠가는’ 하는 마음가짐으로 후일을 도모하자. 그때부터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고 나면 작가 약력에 적힌 나이를 유심히 보며 어떻게 데뷔했는지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1968년 생인 리사 주얼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다. 칙릿이든 스릴러든 발표하는 소설마다 연속 히트. 전 세계 26개국에 번역되어 천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최근 작품들은 대개 영화나 드라마화가 진행중인 영국의 대표작가. 이 사람은 그야말로 ‘Natural born writer’구나 생각했다.
한데 뜻밖의 유년 시절이 있었음을 알고 조금 놀랐다. 자신이 태어난 런던 북부의 작은 집에는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고, 리사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부모님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먹고사는 데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나빴던 건, 직물 중개인이었던 아버지가 보통의 아버지들보다 훨씬 더 권위적이었다는 점이다.
“아빠는 ‘의견을 가진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집 밖에 나가 노는 것도 싫어해서 우리 자매는 늘 집에 처박혀 있었지요. 동생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훗날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좀 되었을 거라고 리사는 말했다.
대학에서는 미술을 공부하고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패션 소매업체인 Warehouse에서 일하던 중 남편을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남편이 그들의 연애 시절에 보여준 ‘애정 공세’는, 곧 리사의 삶을 모든 면에서 통제하려는 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친구를 만나거나 심지어 옷을 입는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했다.
퇴근 후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난리가 났다. 때문에 야근을 할 수도 동료들과 저녁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PR매니저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졌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감정적 교감이 불가능하고 가족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려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첫 번째 결혼을 끝내고 글쓰기 수업을 신청한 이유는,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뭐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우연히 눈에 띄었고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수업은 재미있었다. 자신이 쓴 글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으면서 자신감도 회복했다. 마침 회사에서 해고된 덕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나는 그때 닉 혼비의 소설을 읽고 작가가 되려면 중년 남성이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독자들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친구가 ‘그냥 써.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만약 나에게 세 장을 써서 보여주면 네가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쏠게’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 챕터는 결국 리사의 데뷔작 <랄프의 파티>로 발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역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법이다. 당시 유행하던 장르인 칙릿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리사가 쓰고 싶었던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였다. 이때부터 어두웠던 과거가 빛을 발한다. 리사의 소설에 가족과 집(집착, 고립, 가스라이팅)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어요. 전에는 인생의 지도라고 할 만한 게 없었거든요. 내 인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지요.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제 인생은 의미와 목적을 가지게 되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세 챕터만 써보라는) 친구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거죠.”
런던에 거주하며 두 번째 남편과 함께 딸 키우는 리사 주얼은, 매일 소설을 쓰는 한편으로 여러 매체를 통해 자신처럼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리사 주얼의 Top 5 Writing Tips>
1) 글쓰기가 낭만적일 거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재미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특히,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생에서 가장 도전적인 일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읽기 쉬운 글이라도 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2) Read (not normally way)
평소 읽는 방식대로 읽지 말고 작가가 한 일을 살펴보세요. 장면 전환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대화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기술은 무엇인지, 처음 등장하는 캐릭터는 어떻게 묘사돼 있는지.
3) Start
4) Keep going
5) Finish.
우선 시작하고, 계속 쓰고, 꼭 끝내세요!
마지막 세 가지는 단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작한 글을 끝내지 못했는지 알면 놀랄 겁니다. 현실적인 기대를 가지되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나에게 세 챕터만 써보라던 친구처럼) 단 한 사람만 마음에 들어 하면 됩니다. 그걸 알았다면 당신은 이미 반쯤 온 겁니다.
덧)
리사 주얼의 신작 <가족주의보>는 위의 글쓰기 팁을 공부할 수 있는 마침맞은 소설입니다. 빠른 장면 전환, 입체적인 캐릭터,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한 번 책을 잡으면 롤러코스트처럼 끝을 보기 전까지 내리지 못하도록 만들거든요. 대단한 흡입력. 저도 그래서 계약했고요.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짬뽕져 어우러져 있는지 한번 거들떠봐 주시길.
삼송 김 사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