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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j1821님의 서재
  •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 정재은
  • 18,000원 (10%1,000)
  • 2025-08-30
  • : 650
정재은 감독의 에세이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을 읽었다. 아마도 내가 처음 본 건축 다큐멘터리 <아파트 생태계>를 만든 감독님(영화를 다 본 후에도 OST <만질 수 있는 널 사랑하네>를 한참 동안 들었던 기억이)... 그가 막 픽션에서 논픽션으로 넘어온 시기, 정기용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를 만들던 때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도대체!)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큐 만들기의 기술 같은 것보다는) 다큐란 어떤 마음으로 만들어지는가. ‘촬영을 시작했을 때 상상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도착’(207쪽)하고 나면 무슨 말을 하게 되는가. 만들기로 한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에 흐르는 그 강을 어떤 자세로 건너지?

시나리오가 명확한 극영화와 다르게 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느 시점에서든 끝내기로 결정하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나를 조종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따라서 이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루뭉술한 예감을 좇아 많은 것을 우선 담고 보게 된다. 종종 현실의 장면 앞에서 연출자는 반감을 느끼거나 머뭇거린다. 그리고 이 모든 망설임 역시 영화를 완성하는 요소다. 현실(논픽션)을 살아가는 사람의 일부분을 취사 선택해 보여 주기(결국 다른 방식의 픽션). ‘공간인 것 같지만 건축의 본질은 시간이다.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고 변한다’(109쪽)라는 정기용의 말처럼 영화로 선택되지 못한 무수한 장면들, ‘다른 플롯의 조각들’은 끊임없이 그 의미를 달리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완전하게 캐치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접하며 해석되지 않는 영화의 세계에 매료되곤 한다. 의도된 불균질성이 성급하게 만들어지는 서사에 흠집을 남기게 되며 이는 관객에게 좋은 자극으로 남게 된다. (...) 나에게는 정기용이라는 한 인물의 삶이라는 사건을 한두 시간짜리 영화로 박제화하고 봉합해 버렸다는 자책이 있다. (...) 어쩌면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영화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그런 영화가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본다.”(153쪽)

정재은이 정기용을 주인공으로 삼아 다큐를 찍어 가듯, 독자 또한 정재은이라는 주인공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갈팡질팡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농담조로 말해 보자면.. 내가 생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일거리 중 하나는 ’누군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물으면 아직은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상태‘(70쪽)를 견디는 것이다. 특히나 ‘다큐멘터리 필름 메이킹은 자칫하면 긴 시간 동안 내가 뭔가 중요한 것을 찾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228쪽)키므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서사화, 기존의 영화 산업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다루기도 한다.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다는 자책’(75쪽), 내면의 갈등을 처리해야만 하는 창작자의 일기. 자연히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 피칭이나 지원 프로그램의 현실들이 엿보인다. 이러한 다큐 영화를 공공재로 여겨 ’산포‘하겠다는 정재은의 비전도.

정기용 건축가는 타고난 주인공이다. 만약 정기용과 정재은이라는 거울로 나를 비춰 본다면? 나라면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넉넉한 품의 주인공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기꺼이 그의 거울이 될 수 있을까? 기록하면서 깊어지는 관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로 막막해지지만...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의 초상화를 온전히 그릴 수는 없는 법이고, (언젠가 그런 기회가 온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초상화를 그려 가면 될 일.

+) 정기용의 입말이 살아 있는 텍스트 덕분에 더 생생한 책. 이제 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보고 싶다..
++) 154쪽에 딱 한 페이지로 들어 있는 정기용의 일화가 너무 재밌고 좋음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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