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을 읽었다. 원제는 ‘Appetite’인데, 책에서 이 단어는 단순히 식욕이 아니라 더 폭넓은 갈망을 일컫는 데 쓰인다. 충족되지 못한 마음, 무언가 빠져 있다는 느낌, “포만과 충만과 쾌락이란 것이 내가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 깊이 없”(21쪽)을 때 드는 감정. 구판의 제목은 ‘세상은 왜 날씬한 여자를 원하는가’라는데, 이 제목은 자칫하면 ‘한 거식증 여성의 수기’ 정도가 예상되는 반면 ‘욕구들’이라는 제목은 더 포괄적인 느낌, 욕구를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다룰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왜 ‘식욕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다가 내린 결론.) 거식증 환자였던 저자 자신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여성의 욕망과 그 종잡을 수 없는 지류라는 더 큰 개념”(11쪽)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그녀가 거식증을 겪었던 시기는 페미니즘의 첫 번째 물결이 지난 후 다음과 같은 혼란을 느낀 시기와 일치한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으나 “그런 자유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내가 품고 있던 불분명하지만 뿌리 깊은 일련의 감정들과 모순”(25쪽)된다고 느낀 시기. 많은 여성들이 이론적으로는 자유롭지만 여전히 여자들에게 금지된 것, “너무 많이 먹지 마. 너무 커지지 마, (...) 너무 많이 원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의 언어들이 존재하고 내면화된 데에서 오는 괴리, 혼란, 죄책감, 불신을 느낀다. “권리와 자격이 본능적이고 영속적이며 실질적인 수준에서 느껴지려면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영역에 존재해야만 하고, 더 폭넓은 차원에서 알려지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여자들은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지난 40년 동안 이뤄낸 그 모든 개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저 바깥세상을 거의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 나는 이 격차, 즉 한쪽에 있는 개인적 자유와 다른 쪽에 있는 정치적 힘 사이의 이 끈질긴 불균형이 욕망 뒤에 자리한 불안이라는 요인을 증폭시킨다고 생각한다.” (80쪽)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오히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드는 어리둥절함을 이렇게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니...
욕망에 대한 제대로 된 언어를 갖지 못한 여성들은 욕망을 품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완전히 충만해질 수 없고 감히 그럴 수도 없다는 인식. 이것은 음식을 먹지 않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자해를 하거나, 중독, 방종 등의 방식으로, 여성이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형태로 나타난다. 여성성에 대한 일련의 명령들이 여성의 욕망을 억압하고 마비시키는 상황에서, 우리의 소비자본주의 문화는 그 욕망들을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것으로 치환한다. 당신이 이 가방을 가진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체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집에서 산다면 행복이 따를 것이다, 지금보다 10kg를 감량하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줄 것이다 등등. 이런 가정법들이 우리 내면에 자리한 중요하고도 진실한 갈망을 그저 배경으로 치워 버린다. 자꾸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라보라고 부추긴다. “식욕(케이크의 크림, 지방 함량)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때는 진짜 욕구(기쁨, 열정, 욕정, 갈망)에 대해 걱정할 수가 없다.”(105쪽)
그러나 이 책이 여성의 욕구들에 관한 음울한 분석과 전망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고통만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는 길도 명료하게 알려주는 목소리”(11쪽)가 있다. 그녀는 우연히 ‘조정’을 시작하면서 점차 거식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욕구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희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느꼈다. “욕망에 이름을 붙여야 하고, 무엇이 그 욕망의 성취를 방해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하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관하지 않은 채 억제를 부수고 나갈 힘과 용기와 자기수용을 이끌어내야 한다.”(359쪽) 욕망의 정체를 말하기(심지어 잘 모르겠을 때조차,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아는 기분이 된다),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욕망의 방법을 찾기, 어느 정도의 허기와 공허함이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부분임을 인정하고 심지어 그것이 유용하기도 함을 인정하기, 완벽한 (그리고 닿을 수 없는) 포만의 순간을 좇는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을 깊이 음미하고 누리기. 그 작고도 꾸준한 발걸음을 걷다 보면 아주 손톱만큼이라도 우리 마음의 영토는 확장될 수 있음을 믿는다.
덧붙여, 나는 캐럴라인이 두 쪽을 다 말하는 사람이라 좋다. “나는 40년 동안의 페미니즘보다 헬스장이 여자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줬다고 생각해”라는 친구의 말에 대해 그녀는 “그 40년 동안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여자들은 헬스장에 갈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헬스장은 중산층 이외의 여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데에는 별로 한 일이 없고,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운동 중독에 빠지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에겐 그것이 멈추지 않는 전쟁이고, 운동조차 그럴 듯한 소비자 경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강에서 배의 노를 저으며 친구의 말을 단번에 이해한다. “기분을 고양시키는 동시에 깊은 평온함을 안겨주며, (...) 세상이 나를 위해 열리기 시작하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만족감이 어떤 느낌인지를 처음으로 설핏 맛보았다”고. 사소하지만 나는 이런 것에서 그녀의 명랑한 지성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