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우에 관한 역설> : 인간의 감정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 본 리뷰는 문학과 지성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객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서포터즈 대상 도서들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소설을 좋아하는 내게는 뒤라스의 <여름밤 열 시 반>이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락 소설 1, 2>도 매력적이었고 또 베르그송의 <웃음>에 대해서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장고 끝에 <배우에 관한 역설>을 골랐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프론트맨에게서 연극적인 재능을 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배우가 관객에게 전하는 것은 서사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감정의 변화다. 서사를 전달함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과 탄식을 자아내는 것이 배우의 목적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풍부한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꼭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디드로는 특유의 대화체로 텍스트를 구성한다. 감수성을 옹호하는 화자와 이성적인 면모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화자가 여러 가지 예시를 들어가며 토론을 이어간다. 텍스트를 요약하자면, 훌륭한 배우가 갖춰야 할 것은 격정적인 감수성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력이라는 것이다. 배역 그 자체로 살아가며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 기법 등에 대해 익히 들어온 나는 이 주장 앞에서 크게 당황했다.
텍스트 내에서 디드로는 연기를 ‘통제’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고 또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끼치고 또 통제하려는 배우에게는 자기 통제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이 재현하는 숭고한 순간들은 자연과 감성이 아니며 그것을 포착하고 유지하는 이는 상상력이나 천재적 능력으로 그것들을 예감하고 냉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다. (33쪽)
그러니 진정한 재능이란 인지를 통해 영혼의 외적 증상들을 모방하고 외적인 기호들을 재현하여 모두를 속이는 것이다. (94쪽)
이런 주장 앞에서 나는 크게 당황했지만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여전히 나는 디드로의 이런 주장들이 21세기의 연극/영화에 완전히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가 존재하는 연극과 상황 속으로 관객을 밀어넣는 영화의 문법이 다르고, 계몽시대 연극과 현재의 연극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느꼈다. 인간의 공감 능력은 분명히 존재하고 또 뛰어나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조건이 분명히 있다. 우리는 우는 사람을 동정하거나 따라 울기도 하지만 ‘뭐야, 왜 저래?’ 등의 말과 함께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하니까. 폭발하는 감정의 존재가 공감과 몰입을 필수적으로 담보하지는 않는다. 디드로 역시 그 점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분명히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고전 연극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제로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어내릴 수 있었다. 번역이 깔끔했고, 주석이 풍부했으며 이 글이 케이스 하나를 깊게 파는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경지식이 부족한 비전공자 역시 충분히 독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번역자가 신경을 많이 썼음을 느꼈다. 통찰력을 가지고 쓰인 글이고 충실하고 친절하게 번역된 텍스트이며 꼼꼼하게 만들어진 책이다.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를 처음으로 접하게 해 준 책인데, 다른 도서들도 찾아볼 생각이다. 본문을 인용하며 리뷰를 끝내고 싶다.
p.120 친구여, 자연의 인간과 시인, 배우, 이렇게 세 가지 모델이 있어. 자연의 인간은 시인보다 위대하지 않고, 시인 또한 가장 위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배우보다 위대해 보이지 않아.
친구여, 자연의 인간과 시인, 배우, 이렇게 세 가지 모델이 있어. 자연의 인간은 시인보다 위대하지 않고, 시인 또한 가장 위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배우보다 위대해 보이지 않아. -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