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급주의가 만연했던 프랑스의 한 시대를 그려낸 ‘발자크‘의 소설.
제목에서부터 이미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르망디 지방의 작은 현에 위치한 도시의 귀족들은 옛 타성에 젖어 데그리뇽 후작의 살롱에 모여 그들만의 사교 모임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끼어들 수 없는 신흥 부르주아들이 비꼬아 부르기를 '골동품 진열실’이라 칭한다.
유서 깊은 데그리뇽 가문이었지만 프랑스 대혁명으로 회생은 커녕 몰락 직전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며 하나뿐인 아들 빅튀르니앵을 파리로 보내 사교계에 입문시키려 하는 데그리뇽 후작.
하지만 철없는 빅튀르니앵은 파리에 입성하자마자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만다.
‘젊은 백작의 저녁 시간은 사교 모임, 무도회, 연회, 공연 같은 것들로 채워졌다. 빅튀르니앵은 도처에 자신의 재치의 구슬을 뿌리고 다녔기 때문에, 사방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난해한 재담으로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에 대해 판단했다. 마치 꽃만 피는 과일나무와도 같았다. 어쩌면 돈 이상으로 영혼이 탕진되는 삶, 더없이 훌륭한 재능이 매장되는 삶, 완전무결한 청렴성이 죽어 가는 삶, 최고로 단련된 의지가 녹아내리는 삶, 그는 그런 나른한 삶을 영위했다.’ (p.108)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탕진하고 제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에서 데그리뇽 가문에게 복수를 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부르주아 뒤 크루아지에를 만나면서 권모술수에 빠져 어음을 남발하고 결국엔 어음을 위조했다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빅튀르니앵의 이런 무모하고 바보같은 짓을 뒤에서 늘 봐주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 집안의 집사이자 끝까지 헌신적이었던 공증인 ‘쉐넬’ 이란 인물이다.
‘쉐넬은 사생활의 그런 미지의 위대한 인간들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실 그 자체였다. 그의 희생의 계속성이야말로 그에게 무언가 엄숙하고 숭고한 면모를 부여하지 않는가? 그것은 언제나 순간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는 선행의 영웅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쉐넬의 덕성은 본질적으로 민중의 비천과 귀족계급의 영화 사이에 위치한 계층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계층은 확고한 교화의 횃불로 양자를 비춤으로써, 부르주아의 소박한 덕성을 귀족의 숭고한 사상에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다. (p.233)
발자크는 보수적 신념의 작가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는 흐름을 꿰뚫어 보고 사태 파악을 함으로써 ’쉐넬‘이라는 인물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아낸 건 아닌가 싶다.
데그리뇽 가문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표현한 부분들이 너무 흥미로웠고, 우리의 현 시대의 모습들과도 비슷한 장면들이 보여서 비교 해 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