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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의 서재
  • 제4의 벽
  • 박신양.김동훈
  • 17,100원 (10%950)
  • 2023-12-20
  • : 2,802

현실과 상상 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며

 

<제 4의 벽> 출간 소식을 듣고 흥미를 느꼈던 이유는 무엇보다 책 띠지 위 ‘작품 131점 수록’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이 궁금하고 보고 싶었지만, 전시회에 갈 수 없었던 상황에 부닥친 나에게 이런 책이라니!

 

그 세계 속 그림과 이야기를 만지며

 

책 속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나는 신기한 책 읽기를 경험했다. 마치 작가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어떤 소리보다도 깊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친절한 목소리였다. 그의 이야기는 다소 생소한 어법으로, 오히려 그래서였을까, 진솔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 너

“너무 그리워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p. 21) 책 속의 첫 문장이다. 그에게는 몹시 보고 싶은 사람, 몹시 그리운 사람,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존재 안에서 숨 쉬는 이들, 그의 있음을 가능케 한 이들이다. 친구 키릴, 스승 유리 미하일로비치 압샤로프, 무용가 피나 바우쉬, 두봉 주교님, 화가 이중섭. 작가는 그들 혹은 그들에 대해 그려 왔다.

 

박신양 작가는 그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그리기’라는 행위로 치환시키고, 그 행위를 통해 그들을 캔버스 위로 소환한다. 거기에서 질감과 색채라는 물성을 입혀 감각할 수 있는 대상으로 실재하게 한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이 ‘그리기’ 과정 중에 발생하는 일련의 작용에 대한 것이다. 작가가 그리워하는 대상에 대해, 그들과의 작용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의 목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들렸고, 나의 내면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듯했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그리움과 회한이 겹쳐서였을까.

 

- 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필수적인 문제이지만 그 자체로는 틀린 질문이다.” (p. 236)

“...‘나’는 원래 있지 않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하나가 아니며 ... 나는 여러 개이다... 그 여러 개의 나는 매우 다양하게 변화 발전하고 유동적으로 흘러가며 여럿의 ‘나’끼리,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시작이 틀린 매우 잘못된 질문이다.” (p.p. 234-235)

 

박신양 작가의 ‘나’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은 확고하고 명확하다. 명쾌하다. 그에게 있어 ‘나’는 이미 존재하는 무엇, 즉 발견의 대상이 아니다. 이 순간에도 변화, 확장하고 있는 것, 따라서 발명해야 하는 주체로서의 대상이다. 이런 ‘나’는 매 순간 어떤 무엇이 되는 중인 현재진행형의 존재이다.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고, 경계를 허물기도 하고, 때로는 경계 위에서 무한변신 중인 존재이다.

 

‘나’라는 개념에 대한 이러한 그의 관점은, 규범, 관습, 제도 속에서 규정되고 기대되는 나를 찾으려는 노력의 헛됨을 지적한다. 동시에 정체성 찾기에 함몰되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우리가 쉽게 포기하고 있는 자유, 잠재력, 가능성에 대해.

 

- 벽

나는 박신양 작가의 <제 4의 벽>이라는 책을 읽으려는 독자로, 그의 그림을 보려는 관찰자로 이 책을 집어 들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그림을 보며 나는 어떤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제 4의 벽>을 무너뜨리고 이미 전혀 다른 존재 양식으로 살고 있는 그를 따라, 다양한 존재 양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김동훈 철학자가 제시한 현실과 상상 그 너머에 있는 ‘알파’를 이미 감각하고 경험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세계의 끝에서: 에필로그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에필로그를 본 적이 있었는가! 검고, 깊고, 웅장하면서도, 그 안에 반짝이는 호수를 품고 있는 동굴 같았던 한 권의 책을 떠나려는 순간, 박신양 작가는 내 앞을 쿵 막아서고는 내게 더 할 말이 있다며 다정한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여전히 그였지만, 본문 속의 그와는 또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서. 최고 반전의 순간, 매력 폭발의 순간. 이 책의 에필로그를 나는, 이 책의 머리 위에 씌워 놓은 왕관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 한 가지 더! 에필로그에서 서지 정보 페이지에 나와 있지 않아, 책을 읽는 중 내내 궁금했던 편집자님의 성함을 알게 되어 격하게 반갑고, 기뻤다.)

 

나오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책장을 넘길수록 더 알게 되고, 공감하게 되고, 무엇보다 정말 즐거웠다. “작가가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독자는 즐거워요” (p. 317) 라는 양희정 편집자님의 말씀에 착안해 보면 그의 그림이 그러하듯 그의 글 역시, 그의 끊임없는 사유와 질문, 공부와 수련의 결과물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박신양 작가가 이 책을 위해 기울였을 노력과 고뇌의 깊이를 감히 가늠해 본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하기에는 절대 쉽지 않았을 작가의 탐색과 탐구의 결과물을 이토록 즐거운 책 읽기의 경험을 통해 선사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다. 박신양 작가가, 한 패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두 분, 양희정 편집자님과 김동훈 철학자님 그리고 그 한 패를 따라 성실하게 글쓰기의 경주를 완주한 박신양 작가에게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박신양 작가의 글을 더 읽고 싶다. 배우이면서 화가인, 이제는 배우이면서 화가이면서 저자인 그의 <제 4의 벽> 너머에 대한 계속되는 질문과 글을 기대한다. 다음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나를 찾아와 줄까. 두근두근.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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