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지나고 있을 때보다는 변화할 때 우리의 손끝에 눈과 귀에 선명하게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목안이 조금 묵직한데? 생각하거나 걸쳐 입은 코트가 조금 덥다 느껴지는 순간, 말라 있던 나뭇가지 끝에서 새눈이 돋는 것을 목격한 순간,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순간. 계절을 느끼는 건 보통 이런 식이다. 다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어제는 따뜻한 커피가 차가운 커피보다 한 잔 더 팔렸고 오늘은 따뜻한 커피와 차가운 커피가 정확히 똑같이 팔렸다"(74p)고 말하는, 카페 운영하는 친구의 말. "야, 내일부터 여름이다"하는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시인의 글은 이런 식으로 우리가 그저 스쳐지나 갈 수 있는 계절의 장면들을 촘촘히 살펴서 책장 하나하나에 기록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 번의 계절을 지나왔고 1년을 미리 보낸 기분이 들었으며, 내가 보낸 어느 해의 여름, 또 다른 해의 여름 그런 것들이 겹겹이 포개지고 쌓이는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시인의 펼쳐놓은 계절의 풍경이 한 움큼. 그리고 그 글들은 뭐랄까... 계절이 바뀌고 우리가 달력에서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절기의 글자들을 볼 때마다 때때로 기억날 것 같다. 전작 <운다고 달라지는 아무것도 없겠지만>에서 보여졌던 따듯한 시선들은 시인의 이번 책에서는 좀더 진하게 따끈해진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 표지를 덮고서 나무를 닮은 표지를 쓰다듬으면, 계절의 흐름을 온 몸으로 담아내는 나무의 표피를 쓰다듬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몇몇 문장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종종 생각날 것 같다. 막상 봄이 오자 '시작'이라는 글을 다시 읽었다. 아직 봄은 초입이고 내가 봄을 지나는 중에는 어떤 페이지가 많이 기억에 남을 지는, 이 계절을 책과 함께 살아가면서 직접 느껴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오월이 되면 덕수궁에 가고 싶어질 것 같다. 등꽃을 보러. 그 아래 한참 있다가 돌아오려고.
"생각 끝에 슬픈 일이 하나 더 떠올랐습니다. 오월이 되면 덕수궁에 등꽃을 보러 가야지, 그 등꽃 아래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돌아와야지 하는 저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지난 오월의 시간을 다 흘려보냈습니다. 이제 막 오월이 지났으니 다시 새로 오월이 오려면 시간은 가장 추운 길을 지나야 할 것입니다. 이 슬픈 일도 함께 슬퍼해주셨으면 합니다."(6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