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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렵 나는 한창 외로웠던 것 같다. 노방전도를 갈 때마다, 공동체에서 사람들과 부대낄 때마다, 그리고 저 멀리 어디선가 나를 내려다보실 것 같은 하나님을 느낄 때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전하는 하나님이 아무런 매력도 없이 종교의 틀 안에 박제된 것 같이 느껴진 것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노라면, 그들은 비웃었으며 기독교를 비난했다. 나의 이성을 총동원해도 먹히지 않는 대화였다. 쩔쩔매며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해 옹호해 보아도 궁색한 변명만 늘어날 뿐 그들의 선입견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더 우울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 느껴야 했던 동일한 외로움이었다. 공동체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좌절감을 맛보며 나의 빗나간 행동에 던져지는 시선들을 피하며 공동체의 경계선을 배워야 했다. 이렇게 일상에 치여 허덕이는 나에게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계신 분이었다. 세상에서도, 공동체에서도, 그분은 만져질 수 없는 불협화음이셨다. 세상과 공동체에 대해 회의하며 하나님 앞에 청산해야 할 죄를 한가득 짊어지고 있던 그 때에, 난 이 책을 만났다.

 

이 책의 저자 도날드 밀러, 처음엔 살내 풍기는 그의 어투에 적잖이 당황했다. 마치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끌며 슈퍼마켓에 가다가 결코 만나기를 바라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내게 다가온 그는 대단한 목회자나 신학자도 아니었고 신앙서적을 쓸 만한 공적도 없었지만, “어이~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 나에게 얘기해 보게”라며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사람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아야 하나, 처음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즐겨 쓰는 가면을 꺼내어 부끄러운 나의 행색을 가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맥주향 가득한 아버지와의 추억과 크리스마스에 만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진솔한 대화들, 그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허물없는 친구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함이었다.

 

밀러의 이야기들은 노래가 되어 나의 마음을 만졌고, 처음으로 와 닿은 노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 노래는 세상과 공동체, 하나님을 향했던 화살촉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게 만들었다. 밀러가 자신이 겪었던 고민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 나는 너무도 놀라 하마터면 크게 소리칠 뻔 했다. 어쩌면 나와 그렇게 똑같을 수 있냐고, 당신도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말이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꺼내어 본 적이 없는 고민들이었건만 그는 먼저 흔쾌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나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죄책감에 하나님이라는 슬롯머신을 당겨보았고, 자기의의 목록을 작성한 채 우쭐해져 있을 때가 많았으며, 사랑은 흉내만 낼 뿐 온통 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 자신에 마냥 머무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널뛰기하듯 반복되는 신앙의 간극으로부터 헤어 나와 새로운 모습으로 그분을 뵙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 지 몰랐다는 데에 있었다. 거룩한 그분 앞에 빛을 사랑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또다시 되살아난 죄와의 싸움들을 겪으며 모자라도 한창 모자란 이런 나를 예수님이 좋아하실지 가끔은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풀 죽은 채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몰라 하는 나에게, 밀러는 거지들의 나라에 대해 들려주었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빚도 지지 않은 체제 속에 살아가는 한 나라의 이야기였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받는 선물이며 그분은 나에게서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 죄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가 그랬듯, 처음에는 나 또한 그것이 부당해 보였다. 하지만 자기훈련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은 지나간 나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나님은 내가 미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려 오신 분이셨는데 왜 나는 한낱 채권자처럼 그분을 대했던 것일까. 갚지도 못할 빚더미에 묻힌 채로 하나님을 피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의 낮은 자기 인식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그릇된 관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나를 찾아왔던 하나님, 온 우주의 창조자 되신 그분을 내가 어떻게 믿게 되었던가! 나 역시 내가 가진 신앙의 경위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무슨 수로도 떨쳐낼 수 없는 믿음, 뭔가가 나로 하여금 믿게 만든다는 그 느낌. 꼭 그때의 그 느낌처럼, 하나님을 도표화하는 것을 그치고 마음으로 외경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예배를 회복하고 그분과의 바른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버리자, 세상과 공동체로부터 느꼈던 외로움의 뿌리도 다름 아닌 나의 마음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밀러가 일러주었던 것도 바로 그 사실이다. 영혼이 건강하려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필요한 법인데, 나는 공동체에 끼어 들어가 자신을 내놓는 것에 서툰 사람이었다. 나 역시 한때의 그처럼 사랑을 돈처럼 썼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인정을 베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정을 거두었다. 공동체가 나를 판단하는 것 같다며 괴로워했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해오던 잣대질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귀한 소유로, 그분의 자녀로 사람들을 대하기에는 자아중독의 뿌리는 너무나 깊었다. 사람들을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재정에 대한 혹으로 여겼을 때도 얼마나 많았던지! 세상을 향한 나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도에 대한 의무감으로 사랑 없는 말들을 내뱉곤 하지 않았던가. 자유주의자와 동성애자들을 향해 전쟁하는 미국 교회들처럼, 세상과 교회를 가르며 믿지 않는 사람들과 증오의 전쟁을 치르느라 나의 마음은 지쳐있었다. 리드 대학으로, 히피들의 숲으로, 자유주의자의 교회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그들로부터 배우고 사랑하기를 원했던 밀러의 태도가 나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삭개오를 치유한 것이 증오가 아닌 사랑이었듯, 한 사람은 변화시키는 것 역시 사랑뿐이다. 그것은 온전한 나의 몫이었다. 내가 싸워야 할 것이 사람이 아닌 바로 죄였다. 종교를 옹호하는 태도에서 나아가 진심으로 공동체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그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로부터 시작해야 할 터였다.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고 박제된 듯 했던 하나님,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분은 나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구석에 이미 따뜻이 내려앉아 계셨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그 곳에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시며! 재즈의 선율처럼 나의 마음을 휘감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제 나도 세상의, 공동체의, 그리고 하나님의 하모니가 되라고. 서걱대는 불협화음을 그쳐보라고. 나를 조율해 가실 그분께 휑한 소리만 냈던 나를 이제는 기쁨으로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즐거운 노래가 영혼으로부터 흘러나올 그때에, 자유의 몸짓으로 춤출 그때에, 나를 찾아와 아름다우신 하나님에 대해 들려주며 다정한 친구와 되어주었던 밀러와 그의 벗들이 몹시도 보고 싶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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