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은 마치 은혜받듯 강림하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랍니다.
[도서협찬]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 그걸 잘 포착하는 섬세함이 필요한 거라네요.
영감~ 지금 내 옆에 있나요? (할멈 말고 영감... 쩝... 이러지 말자 ㅋㅋㅋ)
「노래의 탄생이란 이렇다. 알고 보면 참 싱거운 거야. 거창한 예술적 고뇌보다는 만화책 한 권, 선배의 멜로디 한 자락, 그리고 시대를 견뎌내던 한 청년의 무기력한 진심이 만나 기적을 만든다.」 _p.43
《이층에서 본 거리》에는 ‘다섯손가락’ 이두헌의 노래에 영감이 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그의 노래를 좋아했던 이들에겐 물론 반가운 책이겠지만, 저처럼 가수 이두헌에게 딱히 애틋한 마음이 없는 독자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랍니다.
어제 수요일에는 비가 내렸죠.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을 떠올리거나 배경음악으로 사용하신 분들이 꽤 많으셨을 텐데요. 정작 이 노래를 만든 이는 어딜 가나 사람들이 불러달라고 청하는 이 노래를 유독 부르기 싫어했다고 해요. 그가 첫눈에 반한 여학생 덕분에 탄생한 노래를 대중은 참 좋아했지만, 정작 노래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는 몹시 부담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아, 야속한 그녀.
조금은 유쾌한 짝사랑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진지해집니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던 거리, 창작의 자유마저 빼앗기고, 동네 형도 친구의 아버지도 이유 없이 잡혀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의 노래 중 제가 가장 좋아했던 밝고 경쾌한 리듬의 곡 〈풍선〉이, 민주화를 부르짖던 젊은이들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상상할 수 없는 무자비한 고문에 시달리던 시기에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는 사실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사연을 알고 나니 안온한 2층 창가에서 ‘약국에서 담배를 파는 모순된 세상’을 바라보며 그가 느꼈을 무력감과 비참함이 〈풍선〉에서도 묻어나는 듯합니다.
제게는 마냥 팔이 아프도록 레버를 돌리고 버튼을 눌러댔던 오락실 ‘1942’ 게임이, 그에게는 화염병과 최루탄으로부터 도망친 피난처였다고 해요. 그의 노래와 글 곳곳에는 국가의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다는 자책과 미안함이 배어 있습니다. 가끔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과연 불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었을까’ 상상해보곤 하는데요. 누군가 싸우는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거려 힘들어하는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의 노래 속에 나오는 수많은 그녀들을 함부로 ‘녀ㄴ’이라고 부르지 않을 만큼 교양을 갖춘, 지혜로운 아내를 위해 쓴 곡을 보며 저는 노래를 들은 아내의 반응이 궁금해서 아주 혼이 났는데요. 그 에피소드는 로맨틱한 사랑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영희 씨,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_p.201
이 문장을 사진으로 찍어 형부에게 보냈어요.
“형부! 긴장하셔야겠어요~”라는 멘트와 함께요.
우리 언니 이름이 ‘영희’거든요. ㅋㅋㅋ
형부에게 보낸 장난스러운 메시지 뒤로, 책을 덮으며 새삼 느끼게 됩니다. 국어 선생님의 한 마디로 가수가 된 그의 삶에서 보듯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관심어린 한마디일 수 있다는 것을요. 또 어린 시절의 사소한 행복의 조각들이, 훗날 거친 세상을 버텨내는 단단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도요.
어쩌면 우리가 무심코 흥얼거리는 노랫말의 유용함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거창한 예술적 고뇌 대신 일상의 시선과 무기력한 진심을 담아낸 음악은, 시대를 건너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두드립니다.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다정한 책임감으로 말이죠.
오늘 밤엔 그의 노래들을 다시 플레이해봅니다. 그 시절 안온한 2층 창가에서 그가 포착해 낸 섬세한 영감들이, 이제는 제 곁에서 나직한 위로로 흐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