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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이란 무엇인가
  • 백종현
  • 12,420원 (10%690)
  • 2018-11-20
  • : 1,037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칸트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직접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졸업한지 20년이 훌쩍 지나간 지금 여전히 칸트의 주저인 3대 비판서를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번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그 대강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음악을 즐겨 듣는 내게 칸트의 철학 여정은 그보다 40년 이상 늦게 태어났지만 칸트와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베토벤의 음악 여정과 겹쳐졌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고전적인 질서를 통해 계몽주의 시대 인간의 자신감을 한껏 표출하였고, 낭만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인간이 지상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인가에 대한 회의감은 이미 우리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칸트, 그리고 베토벤의 작품은 여전히 인간됨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 깊은 울림을 준다.

 

칸트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불신감을 키웠을 플라톤은 이데아에 닿을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을 부각시켰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데아의 그림자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칸트 역시 ‘물자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이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밝히고자 했다. 칸트는 진정한 지식을 자연과학적 지식에 한정시킴으로써 지성의 역할을 분명히 하였으며, 이후에 막스 베버와 같은 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의 영역을 경제, 사회분야로 확대시킨 것은 칸트의 엄밀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칸트는 인간이 지성을 활용하여 지식을 영역(학문)을 규정하고 이를 확대할 수 있는 철학적 디딤돌을 제공했다. 또한 지성의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지성이 작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인간의 활동(예를 들어 종교)에도 적절한 위치를 부여했다.

 

한편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과학법칙에 대응하는 정언명령으로서의 도덕법칙을 제시했다. 칸트에 따르면 실천은 감각세계를 벗어난 이성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니, 지식체계가 감각에 기초해서만 존재한다는 『순수이성비판』과는 사뭇 다른 논조이다. 칸트는 도덕에도 자연과학에 상응하는 기초를 놓아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감각의 영역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본 것 같다. 자연현상에는 자유가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인간의 행위는 개인의 자유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현상의 변화를 유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의 토대를 형이상학에서 찾아야 순수이성에 대비되는 실천이성이 수립된다는 것이다. 실천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를 부각시킨 점, 그리고 그 자유의 근거를 절대적인 정언명령에 찾는 것이야말로 칸트다운 엄밀한 철학하기를 보여준다. 즉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되 거기에 엄격한 준거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칸트가 주장한 도덕법칙이 현실과 합치하는가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무조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능사인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면서,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근거를 토대로 변치 않는 도덕법칙을 얘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하나의 질문은 감각세계 또는 경험을 통해서 도덕의 기초를 도출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가인데, 이것은 홉스와 같은 학자가 이미 그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요컨대 우리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질문은 불변하는 도덕법칙이 정말 없는가라는 것으로, 선한 행위가 동기뿐만 아니라 결과 측면에서도 좋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많은 연구들이 이미 시도된 바 있다. 예컨대 한 직장에서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승진을 더 잘한다는 종류의 연구결과가 많이 있다. 이러한 연구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인간은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의지를 갖고 있으며, 이것이 소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 칸트의 철학은 이러한 선의지를 고양시키며,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베토벤의 음악이 그러한 것처럼.

 

칸트는 3대 주저의 마지막 편인 『판단력 비판』에서 인간의 미적 경험에 대한 탁월한 철학적 논변을 제시한다. 칸트는 상상력의 형상과 지성의 규칙이 합치 조화하는 데서 흡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예술성이 뛰어난 영화나 문학작품을 보면 쾌감을 느끼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완성도가 높은 예술작품은 적어도 일정 수준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보편성은, 칸트에 따르면, 지성의 규칙이 인간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가치가 변치 않고 오히려 그 위상이 높아지는 예술작품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만 상상력의 영역에 속하는 형상화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30~’40년대에 제작된 훌륭한 영화를 보면서 요즘 한국의 젊은 관객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 시대에 존재했던 대상, 그리고 형상화의 기술이 지금에는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미적 경험의 ‘장벽’을 극복하고 나면, 잘 만들어진 영화가 갖는 미적 가치는 여전하고 오히려 당대보다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미적 체험이 갖는 보편성과 지속성의 철학적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철학공부를 한다고 하면 특정 학설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틀린 견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중국이나, 희랍, 로마의 고대철학자들의 흔적을 살펴보면, 철학보다는 삶이 우선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최초의 직업적인 철학자로서 기존의 철학적 사유를 망라하여 체계화함으로써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닦은 칸트 역시 개인이 지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철학하기를 강조하지 않았던가. 철학적 사고를 위해서는 엄밀하게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하고, 다양한 학설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행동하면서 생각하지 않는가. 철학이 여기에 기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저서는 어렵게 여겨지던 칸트 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 우리 삶의 기반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번역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싶다. 최근 한국 국민의 전반적인 외국어 실력이 신장되면서 외국의 주요 저서를 원서로 읽는 것이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 사이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원어를 읽는 것의 장점은 분명하다. 번역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미와 느낌을 알 수 있고, 때로는 번역상의 과도한 자유 또는 오역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의 지식은 번역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체화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공감한다. 좋은 지식이 전문가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새로운 지식과 실천의 창출로 이어져야 그 소임을 완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가시적 자산을 창출하는 인문학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좋은 번역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가치를 인정해주는 풍토가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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