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계의 이야기이면서, 다른 세계의 이야기
-한국형 SF 장르로 재구성된 민족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 그리고 혼돈 속에서 피어난 사랑
매년 봄이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나라, 화국은 서양의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인 라잔 제국에 점령당한다. 라잔의 식민 통치로 화국은 '14행정령'이라는 이름이 붙어 전국에 주둔한 라잔 군대에 의해 통치된다.
라잔 총독부는 화국인들에게 라잔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장려하고 생존을 위해 라잔어를 배우는 화국인들이 늘어간다. 또 라잔은 군수 물품 생산을 위해 화국의 철을 수탈하고, 화국에는 라잔의 전쟁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철도가 들어서고 전기가 공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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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또는 한국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들릴 것이다.<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일제강점기를 모티프로 한 SF 소설이다.
화국은 조선(한국)으로, 라잔은 일본으로 치환되기에 소설의 배경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역사임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이처럼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에서 역사적 사실이 재현되는 방식은 '우화'이다.
소설은 항일 서사를 기본 플롯으로 삼으면서도 현실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조선(한국)->화국', '일본->라잔'으로 변경해 역사적 사실을 우회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SF 판타지 장르의 묘미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역사 속 실제와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를 대조하며 읽으니 마치 닮은 그림 찾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한국(조선)을 상징하는 화국의 모습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마찬가지로 라잔의 모습에서 일본 제국 통치, 일본의 특성을 찾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때 유행했던 '외국인은 못 읽는 숙박업소 후기' 같았다고나 할까. '이런 것까지?!' 할 정도로 역사와 문화를 디테일하게 반영하며 풍자를 곁들인 것도 있었다.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한국인이거나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일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한국 문화가 소설에서 어떻게 빗대어 표현되었는지, 새롭게 가미된 SF 판타지 요소는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며 읽어간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다.
동양 마법 세계관에서 동양의 요괴 구미호가 출몰하거나 신화 속 존재인 용이 등장하는 등,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세계관 속에서 매력적인 인물들은 움직이고, 싸우고, 투쟁하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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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일제강점기를 모티프로 한 소설이지만 역사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나조차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서평자는 언젠가부터 역사 콘텐츠를 편안하게 즐기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를 테면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의 탄압과 그에 맞서는 조선의 독립운동 서사의 반복 노출로 인한 지겨움', '역사 고증 콘텐츠를 소비하며 한국인으로서 민족적인 고양감을 느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의무감', '우리 민족의 역사이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과 콘텐츠 제작자의 의도와의 충돌'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역사 콘텐츠를 기피하게 되는 이유들을 흐리게 만들었다.
'내 나라 이야기', '우리 민족 이야기', '한국의 실제 역사 이야기' 이기에 민족의 상흔에 깊이 공감하며 경건하게 읽어야 한다 ... 라는 이른바 민족주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소설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가 우화나 상징으로 현실의 것을 빗대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와 인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항일 독립 서사'의 틀을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설정을 비틀고 소설의 큰 주제인 '사랑'을 중심으로 플롯이 전개되기 때문에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이질적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이게 SF 판타지 소설의 묘미인 듯싶다. 화국과 라잔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오늘날 콘텐츠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동양 SF 판타지, 여성과 여성의 사랑, 검과 붓(무예와 예술), 민간 신앙-판타지와 서양의 과학 기술(마법/부적과 전차/소총) 등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조화를 이룬 세계를 당신도 소설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해당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