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들'의 첫인상은 '넓다'였다. 내용이 넓거나 인물의 마음이 넓고, 혹은 다루는 주제가 넓어서가 아닌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작고 세로가 긴 책이 아닌 가로와 세로가 '넓은' 책이었다는 것이다. 핸디북, 손에 잡히는 작은 사이즈의 책들, 크루와상 백이나 바게트 백에 들어갈 법한 작은 사이즈의 책들이 이제 트렌드가 아닌 하나의 양식처럼 자리잡은 가운데 이렇게 넓은 사이즈의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뭐랄까. 눈물인 줄 알았던 남자의 눈에 흐르는 것이 사실 목없는 사람의 형태였고 이제 징그럽다기 보다는 조금더 우스꽝스러운 기운(?)을 보여주는데 한 몫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작으면 책 디자인팀의 재치가 잘 드러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예상대로 내부는 더 넓었다. 문단과 문단사이의 간격도 적당히 넓었으며 여백도 널널했다. 그동안 작고 좁은 책에서 하도 시달려서(?) 그런가. 술술 읽혔다.
돈 많은 사람은 못되고, 후기 신조선 사회에서 쌍놈의 위치에 있는 회사원 장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보통의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은행원이다. 그러나 어느날 출근길에 갑자기 납치를 당하게 되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납치는 허무하게 끝났으나, 그와 동시에 바다에서 시체를 박아넣는 형벌이었던 '말뚝'들이 도심 곳곳에 나타나면서 말뚝들과 사회의 살아있는 시체인 회사원 장의 알 수 없는 알레고리가 폭발한다.
'말뚝들'은 지난 2000년대의 잘나가던 현대소설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평범한 줄 알았는데 어딘가 나사가 빠진(positive) 주인공 주변인들과 함께 말도 안되는 사건이 얽혀 결국 이 모든일이 전부 '신기한 건 전혀 없는 인간'에 의해 신기하고 가소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총체적 난국의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특히 잠들어있는 시체같은 말뚝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단박에 알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오래된 미래이자 현재형 과거라는 것을. 우리는 이 사회에서 거꾸로 처박힌 채 죽어가고 있는 작은 시체 더미들 중 각각이라는 것을.
다만 이런 비관적이고 씁쓸한 현실 속에서도 작가는 유우머를 놓지 않는다. 피식 거리면서 새어나오는 웃음과 장의 좌충우돌한 행동거지가 너무 무겁게만 인생을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마주치면 엎드려 빌기보다는 삥이라도 뜯는 편이 낫다는 게 장의 지론이었다. 특히 삥을 뜯는 게 중요했다. 제대로 된 신이라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게 틀림없고, 체면이 있어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힘들며, 속성상 보복보다는 용서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P154
있어야 할 자리를 자꾸만 벗어나는 게 시대적인 트렌드인가 싶었다.-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