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53권이다.
1999년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이후 첫 시집이다.
사실 시인 이산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인터넷 검색하니 예전에 읽었던 <체 게바라 시집>의 편역자였다.
선택한 이유는 창비시선과 제목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에 대한 개념을 제목으로 삼았다.
이 시집에는 ‘악의 평범성’이란 제목의 시가 3편 있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밑줄을 치고, 나를 돌아본다.
하지만 다른 시들도 읽으면서 작가의 이력을 찾아보게 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사건이다.
‘한라산 필화 사건’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항소이유서>에 “28살 무렵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를 읽고 찾아봤다.
이때 공안검사가 황교안이란 것을 읽고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비극 하나를 엿본다.
그가 체포된 소식이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는 피난은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이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버킷리스트>에 나온다.
그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읽다 보면 낯익은 이름들이 생각보다 많다.
<멀리 있는 빛>에서 감옥에 있는 그에게 [토지] 한 질을 보낸 친구가 나온다.
누굴까? 궁금해할 때 “그날의 상주는 ‘입속의 검은 잎’이고 문상객은 잿더미들이다.”란 시어를 발견한다
요절한 시인 기형도인데 갑자기 그의 시집을 다시 읽고 싶었다.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지옥의 묵시록> 부분)에 나를 돌아본다.
아직 삶이 시인의 삶에 비하면 너무 평탄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욕조>에서 “금방이라도 악의 평범성을 증명할 것 같은”이라고 자코메티의 조각상 {걷는 사람}을 말한다’
그 조각상을 찾아보지만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찢어진 고무신>에서 “내 하얀 고무신의 뒤축을 이빨로 물어뜯어” 전달한다.
“필시 먼 길 떠나는 줄도 모를 그가 / 조금만이라도 햇볕을 더 쬐고 가라고”
찢어진 고무신을 신고 떠난 사람이 사형수란 것을 알고 순간 멍했다.
“나를 하나 더 탐하는 게 / 이렇게 어렵구나.”(<돌탑> 부분)은 그의 철학을 엿보게 한다.
이렇게 작은 일에도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그의 모습이 왠지 슬프다.
“죽은 자 여럿이 / 산 자 하나를 / 따라가고 있다.”(<추모> 전문)
이 짧은 시가 수많은 생각의 고리를 만들고 고민하게 한다.
<악의 평범성 1>에서 온라인에 올라온 혐오 게시글 일부를 인용한다.
제 정신이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에 놀랐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 2> 부분)
내 안의 악을 깨닫고, 평소 생활과 악은 전혀 관계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죽고자 했지만 죽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담은 시들은 먹먹하다.
<살아남은 죄>와 <흙수저>의 그들은 살아남은 시간 동안 고통과 아픔이 연장되었다.
<토끼훈련>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훈련 방법 중 하나다.
“어린 병사들이 내장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도록 명령했다”란 표현에 놀란다.
“베트남의 수많은 학살은 우연도 실수도 아니었다.”란 시어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사실을 내가 몰랐을까? 아니면 잊고 있었을까?
“그 목걸이를 본 이후 내 영혼은 완벽한 잿더미로 변했다.”(<영혼의 목걸이> 부분)
이때 완벽한 잿더미는 어떤 의미일까?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것일까?
“모든 권력도 국민이 아니라 자본과 / 소수 좌우엘리트들로부터 나온다.” (<촛불은 갇혀 있다> 부분)
이 시어를 읽고 공감했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집 전체가 역사와 현재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환기하고 생각하게 한다.
이 시인의 다른 시집도 시간 내서 찾아 읽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