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다. 큐레이터도 해보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화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림이라는 틀 안에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돈 생각하면 작가를 오래 못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아러니하게도 모두가 돈 때문에 그림을 그만두었다. 돈이 너무 많아도 혹은 너무 없어도 하기 어려운 것이 예술이라 했던가. 정말 그랬다. 누군가는 돈이 많아져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누군가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ㅡ22~23P
그렇게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며 그림과 관련 없는 직업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들은 나를 보고 놀란다. “네가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놀기 좋아하고 눈에 잘 띄지 않던 내가 졸업 후에도 진지하게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처럼 완벽을 추구하지 않고 그림 자체를 즐겁게 받아들였기에 지금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주변을 둘러보면 천재성이 보이거나 실력이 뛰어나 주목받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꾸준히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다. ㅡ23P
작가로 산 지 어느덧 10년 남짓이 되었다. 누군가는 내게 좋아하는 일을 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좋아하는 일 한 가지를 하기 위해 열 가지를 포기하며 산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직업과 취미와 삶이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게으른 사람도 예술가가 될 수 있지만 게을러서는 예술가로 살아남을 수 없다. ㅡ26~27P
⁎
오랜만에 가벼워 보이는(그러나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에세이를 읽었다. 제주도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루씨쏜이라는 작가이다.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이곳저곳을 헤맨 삶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왠지 낯설지 않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를 헤맸던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나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독일 서부 에센(Essen)이라는 도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특별히 위의 글을 인용한 것은 최근 들어 부쩍 현실적인 고민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떠나고 싶은 마음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구분한다는 것이 아직도 내겐 어렵다. 이십 대 초반부터 일 벌이기를 좋아했다. 어느새 이십대 후반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전히 ‘시작 중독증’을 앓고 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좋아하는데, 그것이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는 지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게으름과 산만함을 언제나 아름다움으로 치장하려 한다. 방황하는 삶의 순간에 시적인 문구를 갖다 붙이며 시작詩作이라는 합리화를 덧입힌다. 지독한 고질병이다.
그러나 나는 시작이 좋다. 한때 중독증세가 화두가 되었던 게임도 지금은 E-SPORTS로 당당히 자리 잡았듯, 처음에는 두려웠던 시작중독증이 지금의 나에게는 하나의 게임이자 삶이다. 이제는 내가 짧게 지었던 시들을 엮어 하나의 유기적인 작품을 만들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지금까지의 삶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목표 하나가 생겼는데, 내가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을 완벽히 대변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일을 통해 나는 “직업과 취미와 삶이 모두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그 목표를 위해 다시 시작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게으름부터 어떻게 해보자!
이 글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