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링크의 흐르는불















 이번주부터 한달간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교체한다. 출근시간을 5분 당기면서 그동안 엘리베이터가 만들어준 시간이 얼마나 될지 잠깐 계산. 한달에 최소 4시간 이상이다. 그러다 엘리베이터가 생긴지 얼마나 됐나 궁금한데 고층 건물의 등장 이후일 거라 생각보다 짧겠지 싶다. 그런데 의외로 기원전 200년 콜로세움부터 시작이었다.(나무위키ㅋㅋ) 맹수가 으르렁하면서 확 튀어나오는 연출을 위한 용도. 


 그러다 기원의 기원에 대해 생각한다. 왜 사람은 기원같은 걸 생각할까? 엘리베이터의 경우를 보면 쓰잘데기없는 관심이다. 단순히 모르는 거에 대한 호기심 때문.(사피엔스의 생존본능에서 왔겠지?) 최근 찾아봤던 타로카드의 경우를 보면 사랑이다. 애정이 생겼기 때문에 별게 다 궁금해지고 태생부터 궁금한 것. 아마 고인류 시절에도 뗀석기나 동굴 벽화를 보다가 이건 처음에 누가 만들고 그렸을까? 거참 천재만재네 외계인일지도 몰라 외계인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되지? 이렇게 꼬꼬물 생각에 빠지는 N타입이 있었겠지. 라샤펠의 늙은이처럼 누군가 도와줬을 거고.


'진화'라는 개념은 사실 아무런 가치(또는 방향성)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 진화했다는 뜻은 변했다는 뜻이지 더 나아졌다는 뜻은 아닙니다.-291p

진화에서, '우월'과 '이익'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갖게 된 특성(형질)이 우연하게 바로 그 순간의 환경에 적합하다면, 그 형질은 우월하고 유리한 형질이 됩니다. ...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특성은 없으며 절대적으로 불리한 특성도 없습니다. -274p


 정확한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얘기가 좋다. 그 정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접근 방식 자체가 믿을만해서. 본래적 의미를 떠나 일반적으로 쓰는 사회화된 언어가 너무 많으니까. 사전에 정확하게 이것을 이런 의미로 쓰기로 약속하지 않으면 얘기가 꼬인다. 

 실제와 다르더라도 변인을 통제하고 본질만 남겨서 실험해보는 게 좋다. 현실과는 다르지만 본질적인 요소와 변수들을 궁리하고 예측해보는 게 재미있고. 실은 이게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도 변수가 너무 예외적이라도, 맞고 틀리는 과정 자체가 내가 어렴풋하게 뭔가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신호라서 의미있다. 현실에 대한 이해는 이 확인된 본질을 바탕으로 살을 붙여가고 있다. 본래적 정의나 범주를 합의하는 게 왜 나에게 중요하냐면. 아마도 나한테 자연스러운 내가 늘 아슬아슬하게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사람일 때가 많아서이고. 동시에 그렇다고 내가 잘못됐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다.


 잠깐 책얘기로 빠지면 고인류학에 대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포인트와 관련된 지식들이 딱 알맞게 배치된 영리한 책이었다. 연재글을 엮은 책이라 꼭지 하나 분량이 약간 부족한듯 아쉽게 적당했고, 동굴 벽화 느낌의 일러스트가 너무너무 귀여웠고, 곳곳에 들어온 이상희 교수님의 진지한 얼굴과 화석 사진도 좋았다. 인상적인 부분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직전까지만 다룬 것. 지루할것 같은 주제에서 사람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서사와 통찰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세계적으로 히트까지 친 책 이후에 고인류학을 다루는 글을 어떻게 더 써볼 건지에 대한 멋진 결과물이었다.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면서 재미를 주고,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는. 자기가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지고, 관점을 형성하고, 나아가서 사회적 의미를 고민하고, 그걸 세상과 공유하려는 노력까지. 전형적으로 내가 세상 멋지게 생각하는 타입의 사람이 만든. 멋진 결과물에는 언제나 좋은 팀이 있는데. 치밀하고 세심하게 기획한 편집자의 공이 큰 책이었고, 그 과정도 짧지만 충분하게 공유하며 마무리되어 더 좋았다. 


 다시 돌아와서 너무 열린 결말로 끝나는 소설이 싫은데 너무 열린 기원으로 끝나는 고인류학책이 왜 재밌었는지 생각한다. 거대한 막연함 앞에서 작은 뼈조각 하나라도 일단 어떤 가정을 세워보고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우겨보는 게 재밌었다. 일단 하나의 논리가 시작되면 그걸 바탕으로 추리해가는 과정도 재밌었고. 나중에 폐기되더라도 그 가설 안에서의 연결성은 변하지 않고 의미를 남기는 점도 좋았다. 그냥 과학적 사고가 멋진 듯ㅋㅋ 어릴 때는 질서정연한 세계가, 납득할 수 있는 점이 속시원해서 다 쓰여진 과학을 이해하는 게 좋았던 것 같은데. 성인이 되어서는 MJ님 얘기처럼 과학과 예술의 근본적 속성 자체에 매혹된다. 흐르는 것, 열린 태도(일정 부분), 없었던 것, 밝혀지지 않은 것을 향하는 점. 지금은 밝혀진 걸 이해해보는 것, 밝혀지지 않은 걸 아무렇게나 궁예해보는 것. 둘 다 좋아한다. 시간과 에너지만 무한대로 쓸 수 있다면?!


세상에 가치 있는 것치고 대가가 없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 지금의 모습은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소중한 모습입니다. -281p

 

 요즘 타로카드를 공부하면서 우연과 운명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원래 나는 운이나 운명같은 걸 지독하게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ㅋㅋ 정말로 가치있는 것을 바라고 원할 때는 철저하게 그에 따르는 노력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준비가 부족했을 때 노력 이상의 결과를 바라지 않고, 마찬가지로 충분히 애썼을 때 따라오는 결과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당연하니까 당연한걸 당연하게 생각할뿐ㅋㅋ 물론 공들임과 별개로 결과는 좋을 때도 안 좋을 때도 있었지만, 진하게 보낸 시간은 반드시 나에게 어떤 값진 걸 남겨서. 지금도 가치있는 것일수록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인의 영역),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천과 지의 영역ㅋㅋ). 돌아보면 내가 받았던 결과들은 내가 치른 대가를 훌쩍 뛰어넘는 후한 운이 따랐었다.


 분기점에서 내가 했던 선택들은 지금에서야 생각하지만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의도했던 것보다는 대부분 사소하게 여겼던 사건과 사람들이 나를 어떤 지점으로 분명하게 이끌었다. 자연계에서 일어났던 모든 진화와 방향성이 우연이었다는 점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내 삶에 있어서는 아직 운명을 믿는다. 네안데르탈인이 싫은 유럽인 같지만ㅋㅋㅋ 그냥 지적인 생명체의 태생적 한계 같다. 내 뇌니까 내가 세상 제일 의미있고 중요하지뭐. 대신 언제든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한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인간은 진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만든 문화와 문명으로 자신의 진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특이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위해 그 특성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274p 


 내 시간과 공간대에서도 무작위로 움직이는 원자의 움직임처럼 수많은 우연인듯 필연인 듯한 점들이 쌓여 뭔가가 그려지는 중이다. 부질없이 예측 오류가 나는 일들 앞에서 강렬한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을 바라보며 언제나 다시 열심으로 임하고 싶다. 운명이 그어주는 과감하고 굵은 선은 어쩔 수 없는 거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그림체와 색에 집중. 인의 영역에 초점 초점. 어떤 우연을 운명으로 그어갈지, 어떤 운명을 스쳐지나갈지 선택하면서. 뽀짝뽀짝 점을 찍었다 이었다 깜박이는 커서를 째려보며 다시 엎어보기를 반복하면서.


 우연히 신청했던 이번 독서모임도 실은 치밀한 운명의 계획으로 느껴지는데ㅋㅋㅋ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 책모임과 사람에 대한 갈증의 누적. 그걸 유발하기 위한 2년간의 빌드업과. 갈증 이전의 욕구 인지를 위한 10년의 시간과 반자발적 상실. 또 어쩔수없이 휴식기를 만들어내는 빈번한 체력적 번아웃. 또 지각과 빨래와 수리부엉이와 커피. 또 데자와와 노트북과 실리카겔과 아침형인간. 또 프랑켄슈타인과 김학진 교수님. 지난 여름 내 매트릭스에 난입했던 타로카드까지. 이게 다 어떻게 운명이 아닐 수 있을까나~


 아쉬움에 자꾸 글이 늘어지는데. 3월에는 아마도(오라클에 따르면?ㅋㅋ) 기다리던 강의와 날짜가 겹쳐 2월이 이번 시즌 마지막 모임이 될 것 같다. 순간적이든 오래 고심했든, 우연이든 운명이든 내가 한 선택을 정답으로 가꿔가는 게 좋다. 그러니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이번주 토요일도 자유롭게 열심히~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